사치가 되어버린 자존감 상승의 꿈

건강과 안전의 부재는 자존감과 꿈을 사치로 만든다.

by 그레이숲풀

다음날 아침.

뿌듯함은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무기력의 날들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취기에도 살아있는 귀소본능처럼 부정적인 생각으로의 회귀본능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렇다 할 나쁜 일도 없었으면서 어느새 뿌듯함은 사라졌다.

그저 다시 다가오는 자피치 날짜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역시 발표 공포 극복도, 자존감 상승도 한순간에 가능할 것만 같았던 느낌은 착각이었던 것이다.


'너무 죄송하지만 못하겠어요. 죄송해요.'

자피치 호스트님께 보낼 메시지란에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생각을 할 때도 (물론 가족 생각이 더 컸지만) 무서워서 떠나지 못했던 이 바보는,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히도 1회 차 때 도망치지 못했던 것처럼 2회 차도 결국 참여하고 말았다.


호스트님의 질문을 받았다.

"1회 참여 후 한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내 대답 후 사람들이 크게 웃고 있었다.

"아. 진짜 솔직히 너무 무서워서요.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환불 안 받아도 좋으니까 그만한다고 그러고 그냥 도망쳐버려?' 하면서 계속 생각하다 왔어요."

아무래도 다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사회경험도 제일 많고 나이도 제일 많은 내가, 게다가 일상생활에서는 재잘재잘 잘도 말하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신기하고 공감이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인정 욕구가 강한 탓인지 개그 본능이 있어서인지 누군가를 웃겼다는 사실이 기쁜 마음에 2회 차도 이야기는 술술 써졌고 꽤 잘 마쳤다.

게다가 '자존감 스피치'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정, 보완할 점에 대한 신랄한 피드백보다는 잘하는 점에 대한 피드백이 주를 이루었는데 내게는 이 점이 너무도 잘 맞았나 보다.

'맞아. 나는 발표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무언가 때문에 두려울 뿐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귀가했다.


두려움-안도-착각-다시 공포-기쁨을 반복했으니 이제 착각이 찾아올 때였나 싶지만 아니, 그보다 더 큰 좌절의 차례였다.




마스크를 써서라기엔 너무도 숨이 막혀 호흡이 힘들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좋아졌던, 머릿속에 천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두통도 다시 느껴졌다.

한 번도 우리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우리 집 막내, 강아지를 입원실에 두고 돌아오는 길에 느낀 감정이었다.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단 하루 만에 입원을 했고, 원인도 모른 채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만 듣고 입원실에 떼어놓고 오는 길은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다.


예민해진 가족들은 서로의 작은 언행에도 크게 반응했다.

퇴직금과 월급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병원비는 수백에서 천 단위가 예상된다는 이야기가 들리지만 보험조차 들어두지 못했다.

겨우 고비를 넘겼지만 치사율도 높고 재발률도 높다는 병원의 말은 그중 최악의 고통이었다.


자존감? 꿈? 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