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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투리 May 02. 2024

내가 비싼 옷들을 샀던 이유...

나의 가난한 소비 이야기


나이가 들고 보니 "어디에 살아요?"라는 질문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상대가 비싼 동네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자가인지 전세인지 말이죠. 결국 알고 싶은 내용은 본인 혹은 부모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일수도 있습니다.


그 방법이 세련 되지는 않지만 "어디 대학을 나왔어요?"와 같은 질문보다는 덜 직접적이기에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게 여지를 주는 부분에서 질문자에게 안도감을 주거든요.


그 질문들이 여러 이유로 상당히 불편했음에도 처음 보는 사람과 할 말이 없으면 저 또한 이 질문을 쓰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그냥 어색한 분위기에 나오는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일 수도요...


제가 이 질문을 받을 때면 동네 이름을 먼저 얘기한 뒤, 추가 질문으로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한 뒤에 원하는 답변을 해주곤 합니다.


"@@동에 삽니다."

"비싼 동네에 사시네요." (너의 재력 수준을 알고 싶어)

"자가 아니고 월세예요." (이러면 됐지?)










사회 초년생일 때는 이런 질문에 하나도 신경을 안 썼던 것 같은데... 저 또한 속물적으로 변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대신 그때는 다른 불편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옷 이쁜데 어디 브랜드야??" (라벨을 확인하며)

"아, 이거 그냥 인터넷에서 산 옷이에요..." (마치 옷이 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당시 회사에 제가 입은 옷의 목부분을 뒤집어까서 라벨을 확인하는 상사가 있었습니다. 분명 그 행동에는 악의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입은 옷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거든요.


브랜드 옷을 안 입었던 저는 그 행동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보세옷을 입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일부러 브랜드 옷을 찾아서 입기 시작했어요.


그 선배처럼 옷을 뒤집어 까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내 옷으로 나를 안 좋게 판단하는 게 두려웠거든요. 즉, 가난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라 표현하지만 그냥 궁핍했던 제 마음입니다)  








돈을 함부로 쓰는 이들을 사치와 허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면에는 그저 저처럼 마음속의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싶은 이들도 많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은 딱히 비싼 브랜드의 옷을 일부러 사 입지는 않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질 정도로 자존감이 높아진 것일까요? 나를 부자로 봐주길 바라지도 않고 나를 가난하게 보는 것도 상관은 없거든요.


아니면 그냥 그런 것들에 무뎌질 만큼 나이가 든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가난을 궁핍했던 제 마음이라고 표현했듯이. 소비는 이런 마음들이 투영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수준이 필요를 넘어서면 과소비가 되는 것이고요.




내가 사려는 그것의 효용가치에 대해 먼저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이 값 비싼 물건(혹은 서비스)이 내가 쓰는 목적보다 나의 감정적인 욕구를 위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욕구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소시켜 주는지 말이에요.


유행이 지나고 살이쪄서 못 입지만 차마 버리지 못해 옷장에 모셔둔 옷들은 이미 효용이 다했지만 비싼 비용이라는 변명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며 아직도 저의 잘못했던 소비를 비웃고 있습니다.



잠깐의 행복을 위해 배달 음식을 즐겨 먹는 저이기에 자격은 부족하지만 이렇게 몇 글자 적어봅니다.





마음의 공허함과 결핍을 비싼 값으로 지불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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