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천만 원이라는 돈
[여자친구] : "나 할 말이 있는데... 잠깐 나올래??..."
[나] : "어? 그래 알겠어."(뭔가 어색한 분위기에 마음이 무겁다. 혹시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
(카페로 장소가 바뀌고, 두 사람은 마주 앉는다. 여자친구의 표정은 진지하고, 나는 조금 긴장한다.)
[여자친구] : "우리 결혼하자."
[나] :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면서) "갑자기 결혼을??"
[여자친구] : "응... 사실은 말이야, 지금 결혼하지 않으면 너랑 계속 못 만날 것 같아...
(그곳엔 편지도, 꽃다발도, 반지도 없다. 오직, 무거운 공기 속을 헤집고 흐르는 어색한 침묵만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미래엔 못할 것 같다는 말' 그것은 점점 현실적으로 변하며 높아지는 그 친구의 시야에서 제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취업한 지 2개월이 지났을 때의 일이니 1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4년간 연애하고 있던 여자친구가 저에게 한 프러포즈였습니다. 감동 적이고 아름답다기보다는 잔인하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사실 결혼하자는 것보단 현실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에 가까웠고 그 협박성의 일방적인 제안에 화를 내거나 자존심이 상해할 여유도 없었어요. 정확히는 그때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나하고 있었는지 싶습니다.
사회 초년생이 2개월 동안 모은 소박한 돈들은 너무나도 부족했습니다. '결혼'이라는 현실은 제가 받은 '프러포즈'만큼이나 잔인하더군요.
적어도 그때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치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저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쫓기는 심정으로 정말 악착같이 모았습니다. 하지만 2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으로 결혼을 준비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끔 거울에 비친 후줄근한 모습들을 보면서 스스로 실망하고 위축되기도 했었죠.
그 돈마저 빌려달라는 부모님과 삼촌의 전화를 받을 때는 이 가난한 집안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어요. 자연스럽게 그 잔인했던 프러포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거짓말처럼 길었던 우리의 연애는 허무하게 끝이 났습니다.
1년도 안 돼서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모았지만 그 돈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를 후회하거나 그리워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사실 돌이켜보면 돈 때문에 헤어진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냥 스스로를 더 궁핍하게 만들면서 돈을 모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마음의 궁핍을 해소하기 위해 돈을 많이 쓰기도 했는데 허영만 생기고 마음은 항상 공허하더라고요.
지금은 다른 이유로 그때처럼 돈을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옷도 그때처럼 후줄근하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돈이 있고 없고 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써야만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돈을 안 쓴다고 불행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냥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힘든 순간에 돈이라는 주제는 항상 함께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