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겨울, 두 아이를 데리고 항저우에 놀러 왔었다.시호의 아름다움에 취해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미니멀하면서도고풍스러운한 건물을 발견했는데 진지한 금색 글씨로'중국미술학원'이라고쓰여있었다.
당시, 미술로 진로를 정한 중학생 딸에게 말했다.
"K! 여기 잘 봐 둬. 그림 열심히 잘 그려서 나중에 여기 다니게될지도 모르잖아."
내성적인 딸이 수줍게 말했다.
"그런 꿈같은 일이정말 생길까?"
중국 대학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이렇게 멋진 시호를당당하게 마주선미술대학이라니, 명문대학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녀는 동경의 눈으로 그 아름다운 건물을 보고 또 보았다.
시호 맞은 편, 중국미술학원 남산캠퍼스 정문
그로부터 7년 후, 딸 K는 그때그곳, '중국미술학원'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저 멀리 중국 동북 끝 시골, 연길에서 2,300km를 이동,딸을 보러왔다. 그런데딸은아이돌 닮은 중국인 남친과 상하이에 놀러 가고 항저우에 없다는...
유화 과제를 하던 딸 옆에서 아이돌 닮은 남친이 그린 그림, 그 남친은 공대생이란다.
딸도 없고 남친도 없는엄마는, 혼자시호를 간다. 밤에도 가고 아침에도 가고 더워도 가고 비가 홑뿌려도비옷입고간다. 걷고 또 걸어도 그 아름다움이 다하지 않는 시호,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모든 곳이 감동인 시호, 항저우 여행의 시작과 끝 그리고 모든 것,항저우의 자부심, 강남의낭만, 여자의 마음, 시호.
똥손, 똥폰으로 찍어도 경치가 이 정도
시호는오래전부터 아름다웠지만, 그 소통 방식 덕분에앞으로도더 아름다워질듯하다. 일단, 시호는 입장료가 없다. 그래서 울타리도 벽도 없다. 도로에, 산책길에 마냥 활짝 열려있다.신분증도, 짐 검사도, 핵산바코드도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든 맘대로 들어왔다 맘대로나갈 수 있다.칭하이호나 차카염호 등울타리를 쳐 놓고 입장료를 받는 호수가 얼마나 많던가. 이렇게 많은 인력들이 깨끗하고세심하게 관리하는데도입장료가 없다니!
또, 쑤저우교외에 있어 자가용 없이는 가기 힘든 타이호와는 달리, 시호는 항저우시내 한가운데 있어 접근도 편리하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와도, 자전거나 버스, 지하철을 타고도쉽게 호수에 닿는다.꼭시호가 목적지가 아니어도 저절로 지나가게 된다.
쉬엄쉬엄 걸어도 반나절이면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는 시호, 곳곳에 넉넉히 마련된 벤치와 정자, 찻집들. 그 정감 있는 휴먼스케일과 인간친화적 구성 덕분에, 노인, 아이, 휠체어를 탄 사람,조깅 중이거나 데이트 중이거나, 슬리퍼나 힐을 신었어도누구나즐길 수 있다.사람에 차별을 두지 않아,고요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누릴 수 있는,광주무등산(无等山) 같은 무등호(无等湖)인 셈이다.
백사전(白蛇传), 소동파, 백거이 등 수많은 고사와 시인, 명인들의 흔적이 가득한 시호는 역사유적지, 자연경관지를 넘어 이제 문화예술 중심지로자리 잡은 듯하다. 시호를 중심으로,'중국미술학원', '저장성 미술관', '중국 비단 박물관', '저장성 가무극원''동파(东坡) 대극원' 등예술 관련 기관들이집중적으로모여있어 시호와 더불어 강남 예술의 정수를 즐길 수 있다.
'시호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백사전 조형물(좌), 백거이 동상(우)
'저장성 전람관'에 갔더니 자신들의 도시 항저우를 '人间天堂(인간세상의 천당)'으로 칭하며 항저우의 강과 산, 탑과 절, 대운하, 내년아시안 게임을 위한 경기장 등 각종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그 중심에 시호가 있었다.(문득 '헬 조선'이라는 말이 떠올라 씁쓸했다.누구는 천당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사는 건가.)대륙식 허풍이나 체재 선전구호가 아닌, 근거 있는 자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장성 미술관에는 '江南好'(강남이 좋아) 전이 열리고 있었다
항저우에 머무는 마지막 날.
보석산(宝石山) 등산을 끝내고 비 내리는 시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아가려고 왔다가, 호수 앞을뜬금없이 막아선 대형 핸드백을 보고 깜짝놀랐다. 알고 싶지 않은 '빅토리아의 시크릿'을 억지로 알려준다는 속옷 매장도 보인다. 감히, 시호 앞에서 뭐 하는 짓인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 시호를 찾았다가, 명품 매장들의 요란한 아우성에 마음이흐려진다. 시호를 보러 온 사람들 중 저런 걸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이 복잡한 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백화점 안에서는 동경의 물건들이었으나 시호 앞에 세워 놓으니 조야한 싸구려로 보인다.
priceless, 정말 좋은 것에는값을 매길수가 없다.그래서무료다. 이를테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시호곳곳의 깊은 위로와 감동의 풍경들.
상하이에 놀러 간 딸은 하필이면 코로나확진자와 동선이 겹쳐,삼일 동안상하이호텔에 갇혀 관찰격리를 해야 한단다.결국 딸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나만 보면 서글픈표정으로 한 숨 쉬던 우리 엄마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직 철없는 딸과꿈속 풍경, 시호를 두고 가자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항저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항저우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시인, 소동파가 개발했다는 동파육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