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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Oct 08. 2022

시호(西湖)는 무료다

국경절 연휴, 항저우(杭州)를 가다

7년 전 겨울, 두 아이를 데리고 항저우에 놀러 왔었다. 호의 아름다움에 취해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미니멀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물을 발견는데 진지한 금색 글씨로 '중국미술학원'이라고 쓰여있었다.


당시, 미술로 진로를 정한 중학생 딸에게 말했다.

"K! 여기 잘 봐 둬. 그림 열심히 잘 그려서 나중에 여기 다니게 될지도 모르잖아." 

내성적인 딸이 수줍게 말했다.

"그런 꿈같은 일이 정말 생길까?"

중국 대학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이렇게 멋진  당당하게 마주  미술대학이라니, 명문대학임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녀는 동경의 눈으로 그 아름다운 건물을 보고 또 보았다.


시호 맞은 편, 중국미술학원 남산캠퍼스 정문


그로부터 7년 후, 딸 K는 그때 그곳, '중국미술학원'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저 멀리 중국 동북 끝 시골, 연길에서 2,300km를 이동, 딸을 보러 다. 그런데 딸은 아이 중국 남친상하이에 놀러 가고 저우에 없다는...


유화 과제를 하던 딸 옆에서 아이돌 닮은 남친이 그린 그림, 그 남친은 공대생이란다.


딸도 없고 남친도 없 엄마는, 혼자 호를 간다. 밤에도 가고 아침에도 가고 더워도 가고 비가 홑뿌려도 비옷 입고 간다. 걷고 또 걸어도 그 아름다움이 다하지 않는 호,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모든 곳이 감동인 호, 항저우 여행의 시작과 끝 그리고 모든 것, 항저우자부심, 강남의 , 여자 마음, 호.


똥손, 똥폰으로 찍어도 경치가 이 정도


호는 오래전부터 아름다웠지만, 그 소통 방식 덕분에 앞으로 아름다워질듯하다. 일단, 는 입장료가 없다. 그래서 울리도 벽도 없다. 도로에, 산책길에 마냥 활짝 열려있다. 신분증도, 짐 검사도, 핵산바코드도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든 맘대로 들어 맘대로 나갈 수 있다. 칭하이호나 차카염호 등 울타리를 쳐 놓고 입장료를 받는 호수가 얼마나 많던가. 이렇게 많은 인력들이 깨끗하고 세심하게 관리하는데도 입장료가 없니!


, 쑤저우 교외에 있 자가용 없이는 가기 힘든 타이호와는 달리, 시호는 항저우 시내 한가운데 있어 접근 편리하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와, 자전거나 버스, 지하철을 고도 쉽게 호수에 닿다.  시호가 목적지가 아니어도 저절로 지나가게 된다.



쉬엄쉬엄 걸어도 반나절이면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는 시호, 곳곳에 넉넉히 마련된 벤치와 정자, 찻집. 그 정감 있는 휴먼스케일 인간친화적 구 덕분에, 노인, 아이, 휠체어를 탄 사람, 조깅 중이거나 데이트 중이거나, 슬리퍼나 힐을 신었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사람에 차별을 두지 않, 고요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광주 무등산(无等山) 같은 무등호(无等湖)인 셈이다. 



백사전(白蛇传), 소동파, 백거이 등 수많은 고사와 시인, 명인들의 흔적이 가득한 시호는 역사유적지, 자연경관를 넘어 이제 문화예술 중심지 자리 잡은 듯하다. 시호 중심으로, '중국미술학원', '저장성 미술관', '중국 비단 박물관', '저장성 가무극원' ' 동파(东坡) 대극원'  예술 관련 기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시호와 더불어 강남 예술의 정수를 즐길 수 있다.


'시호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백사전 조형물(좌), 백거이 동상(우)


'저장전람관' 갔더니 자신들의 도시 항저우'人间天堂(인간세상의 천당)'으로 칭하며 항저우의 강과 산, 탑과 절, 대운하, 내년 아시안 게임을 위한 경기장 등 각종 아름다운 풍경 담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시호가 있다. (문득 '헬 조선'이라는 말이 떠올라 씁쓸다. 누구는 천당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사는 .) 대륙식 허풍이나 체재 선전구호가 아닌, 근거 있는 자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장성 미술관에는 '江南好'(강남이 좋아) 전이 열리고 있었다


항저우에 머무는 마지막 날.

보석산(宝石山) 등산을 끝내고 비 내리는 시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아가려고 왔다가, 호수 앞을 뜬금없이 막 선 대형 핸드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고 싶지 않은 '빅토리아의 시크릿'을 억지로 알려준다는 속옷 매장도 보인다. 감히, 시호 앞에서 뭐 하는 짓인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 시호를 찾았다가, 명품 매장들의 요란한 아우성에 마음이 흐려진다. 시호를 보러 온 사람들 중 저런 걸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이 복잡한 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백화점 안에서는 동경의 물건들이었으나 시호 앞에 세워 놓으니 조야한 싸구려로 보인다.



priceless, 정말 좋은 에는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래서 무료다. 이를테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마음,  곳곳의 깊은 위로와 감동의 풍경들.


하이놀러 간 딸은 하필이면 코로나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삼일 동안 하이 호텔에 갇혀 관찰격리해야 한단다. 결국 딸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나만 보면 서글픈 표정으로 한 숨 쉬던 우리 엄마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직 철 없는 딸과   풍경, 시호를 두고 가자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항저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항저우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시인, 소동파가 개발했다는 동파육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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