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창 밖으로 휘이익 휘이익 바람이 불고, 키 큰 나무들이 이리저리 속절없이 흔들리는것을본다.
낯선 도시에서,아침일찍부터부지런떨며 스펙터클한 볼거리들로 하루를 꽉 채우지만 결국, 여행이 끝나도오래도록 남는 건이런멈춘 시간들이다.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해지는 호수의 냄새를깊이 들이마셨던 순간, 비 오는 낯선 거리에서 따뜻한 플랫화이트 한잔을 천천히 머금었던 순간, 일상과는 다른 질감의잔잔한시간들.
결국, 1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 먼 곳까지 나를 데려왔다.일상은 떠나왔지만 가장 무거운 짐은 기여코, 여기까지 끌고왔다. 평소 그렇게 남을 못 견뎌하더니, 이곳에서도여전히 혼자다.
연길에서는경량 오리털 점퍼를 입고 출근했었는데 먼 남쪽, 이곳 쑤저우에서는 10월인데도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 어깨와 등을 훤히 드러낸 옷을 입고 다닌다. 같은 나라가 맞나 어리둥절하다.지난 이틀간, 낮 기온 32도, 내리쬐는 햇볕 아래, 1시간에 200원 쯤하는 공유 자전거를 타고 쑤저우 곳곳을 돌아다녔다. '강남수향' 답게 골목길 곳곳에 수로와 다리, 운하들이 일상적으로 놓여있다. 얼마나 운치 있는 풍경인지. 기암괴석(사자림)을 모으거나 정원(졸정원)을 가꿀 여력 같은 건 없는 북간도, 연변 사람들의 춥고 고단한 삶을 한번 더 떠올리게 된다.
가장 놀라운 건,두 개의 성(省)에 둘러싸여있는, 2,250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여의도 10배), 그 안에 9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을 품고 있는거대 호수 타이호였다.(나무위키 참고)시내에서두 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해질 무렵에야 도착했는데 호수에서는 '부글부글', 높은 기온에 생육이든 부패든 무슨 일인가가 바쁘게 벌어지고있는소리가생생하게들려왔다.
'부글부글' 호수가 살아있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올 때는 너무 지치고 배도고파 도시트램을 탔는데 쑤저우 핵산검사바코드가 없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당일 대학병원에서 받은 핵산검사 음성 결과지를 보여줘도 '규정'이라며 막무가내였다.어쩔 수없이 다시 자전거를 타고돌아왔다.깜깜하고 외로운 거리, 몸은 고단했지만 수향(水香)과 꽃내음이 어우러진맑고 시원하고 향기로운 밤이었다.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치솟았던마음이 다시 잔잔해졌다.
해 지는 타이호(太湖), 다시 온다면 자전거를 타고 316.6km 타이호강변을 일주해보고 싶다. 공유 자전거로는 힘들겠지?
여행을 떠나기 전, 브런치 글에서 소개한노래 한 곡을 들었는데 그 노래가 이번 여행내내주제곡처럼 따라다녔다.
그런 말을 내뱉을 사람이 절대 아닌데, 그날 아침 헤어지면서대뜸, 그가 말했다. 뜻밖이라 놀랍기도 하고'나랑 같은 마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기쁨이퐁퐁 샘솟았다.어느덧, 그와는 서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사이가 됐지만그 순간의 행복만은 아직도 남아있다. 가을타는 중이어서든, 연말 들뜬 분위기에 휩쓸렸든, 아무라도 나 좀 안아줘 하는 심정이었든, '순간의 진심 같은 말'도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실망할 것도 자책할 것도 없다.어쨌든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으니까. 그 순간만에라도 진심으로 사랑한 게 어딘가. 그 '순간'조차 없어 거칠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순간만 진심이었다가 사라져도 괜찮다. 변하고 흘러가도 괜찮다. 어차피 그 무엇도 잡아둘 수 없다.
길은 멀고 여전히 바람이 분다.나무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다시 몸을 일으켜 기차역으로 향한다.
다음 여행지는,上有天堂 下有苏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의 항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