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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림 Mar 13. 2023

걷고 싶(지 않)은 도시

도시건축사이 #4

 날이 좋아서, 생각이 많아서, 시간이 남아서, 무작정 걷게 되는 날이 있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도시에 속해있고 싶어, 이어폰을 끼고 러닝머신 위가 아닌 길 위에 발을 내디딘다. 양옆으로 펼쳐진 풍경은 뒤죽박죽이고 골목마다 어디서 차가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해야 하지만 걷기 위해서 감당해야 한다.


 인도 위는 사람 말고도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걷는 동안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 퉁이는 늘 까맣다. 가로등이나 가로수 아래 배꽁초와 쓰레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친구와 나란히 걷다가도 인도를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는 배전함이나 지하철 환풍구를 만나면 줄지어 이동다. 건물 진출입 때문에 갑자기 높아진 턱이나 상가 앞 입간판과 공기 조형물에 부딪혀 넘어질 뻔한 적도 많다.

(좌)인도 위 쓰레기 (우)인도 위 배전함과 PM

 바퀴 달린 것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싶지 않다. 건축후퇴선에 주차하겠다고 인도를 가로지르는 차와 부딪힐까 봐 오히려 차도로 내려가 돌아다. 바닥에 버려진 듯 쓰러져 주차된 전동 킥보드에 발이 걸려 멍이 들기도 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를 걸을 때면 언제 차가 나타날지 몰라 열 걸음마다 아봤고, 좁은 골목에서 비키라는 경적 울리면 건물 옆에 바짝 붙어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좌)차도-인도-주차장 (우)보차혼용도로

 중간에 멈추거나 돌아가지 않고 쭉 걷고 싶다. 어떤 날에는 공원이나 보행자전용도로를 따라 걷다 끊어진 길에 서서 멍하니 건너편을 바라봤다. 엇갈려 놓인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한참을 빙 둘러 가면서 차라리 육교를 찾게 되는 모순적인 날이었다.


 빠르고 높게 개발하는 게 우선이었던 도시가 사람보다는 자동차의 속도에 맞춘 도시가 된 건 당연한 결과다. 지상은 자동차에 내어주고 사람은 공중에 띄워지거나(육교) 지하로 내려갔다가(지하도) 다시 지상을 되찾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것에게 점령당한 인도를 온전히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규정들이 생겨났지만 빼앗긴 걸 다시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시 건축조례는 건축후퇴선의 주차를 전면금지하고 입간판의 설치 위치를 제한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규정을 어긴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그럼에도 3기 신도시개발사업이나 여러 도시재생사업에서 ‘보행친화도시’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기대하게 된다. 사람의 속도에 맞춘 도시를 걸어보고 싶다. 길을 걷는 게 위험하고 긴장감 넘치는 일이 아니라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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