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성미니멀 Sep 14. 2022

너무 애쓰지 않는, 미니멀한 작은 부엌

 30평대에서 10평대로 옮기며  방은 3개에서 1개, 화장실은 2개에서 1개로 줄었고 다용도실과 팬트리룸, 베란다는 사라졌는데 부엌만은 전에도 지금도 한 개똑같다. 


 개수는 같은데 크기 차이가 어마 무시하다. 예전 집의 한쪽 긴 벽면은 모두 부엌이었다. 커다란 상하부장 앞에 큰 아일랜드 식탁, 오른쪽에 팬트리룸 왼쪽에는 보조 수납장이 있었다. 주방 가전들을 줄지어 놓고 써도, 그릇을 진열하듯 두어도, 재료를 여기저기 늘어놓고 조리해도 여유로운 공간이었다.  


 이사 업체가 정리를 마친 작은 집의 부엌. 이전 꺼내놓고 쓰던 것들 중 운 좋게 이 집까지 살아온 것들이 모두 올라와 있. 난감하다. 수납도 수납이지만 조리공간이 턱없이 부족다. 인덕션과 개수대 사이 거리는 딱 3.5L 용량 에어프라이어 하나만큼이다. 드넓은 아일랜드 식탁은 없다. 상부장 오른쪽 가장 큰 문 안에 후드가 들어있고 싱크볼 하부에는 보일러 배관이 들어있다. 그 옆은 식기세척기니 사실상 수납공간은 상부장 한 칸, 하부장의 서랍 두 개가 전부다. 가스배관과 보일러 배관함을 활용해 짜 넣은 붙박이장 일부에 부엌살림이 들어간다. 고백하건대 처음 3일 연속 외식했다. 여기서 무엇을 만들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위 세장은 이전의 드넓은 부엌, 아래 두장은 이사 직후의 난감한 부엌

 

 부엌의 모든 것을 다 꺼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한다. 밖에 나와 있는 것들을 최대한 안으로 넣어 싱크대와 수납장 상판을 비운다. 어지러웠던 부엌을 싹 치우고 새 밥을 해서 계란 프라이에 시금치 하나 무쳐서 먹었는데 부엌이 작고 반찬이 적으니 난데없이 정갈하다. 오우. 이런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은 전과 다를 바 없이 잘만 해 먹는다. 반찬 수는 줄었다. 작은 부엌에서 한 번에 두세 개의 요리를 하기란 버겁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의 요리실력 역시 한 번에 두세 개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압력솥에 밥 하고, 찌개 하나 끓이고, 에어프라이어에 고기 하나 돌려 먹으면 부엌이 꽉 찬다. 그리고 그걸로 한 끼도 더없이 충분하다.


 작은 부엌에서 중간중간 정리하는 습관을 얻는다. 소스 하나 만드는데 간장, 고춧가루, 맛술 등등이 냉장고와 주방 서랍에서 총출동한다. 끓는 동안 틈틈이 집어넣는다. 사용한 그릇은 바로 싱크볼에 넣는다. 요리가 끝날 즈음에는 조리 시 사용하는 가위나 숟가락, 국자, 집게 등을 올려둔 도마 혹은 계량컵 하나만 남는다. 그렇게 한 개 남겨 두면 싱크대 상판을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


 국물 요리 때 쓴 계량컵은 식사할 때 그대로 식탁에서 사용한다. 음식점에 왜 기다란 스텐 통이 있는지 이해가 간다. 국자와 집게를 꽂아 쓰면 식탁을 닦는 수고를 던다. 사소하지만 비닐봉지 하나를 싱크대 위에 꺼내 놓고 조리하면 정리가 빨라진다. 포장지나 채소 껍질, 사용한 키친타월 등 쓰레기가 나올 때마다 바로 넣고 작업 직후 묶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도마는 깨끗한 야채를 먼저 썬다. 기름기 있는 고기류나 가공육은 키친타월 한 장 깔고 자르면 나중에 그 기름기를 물로 씻는 것보다 편하다.

몇가지만 나와도 훅 좁지만 마지막엔 냄비와 계량컵 하나 혹은 도마 하나만 남는다.

 싱크대와 높이가 같은 수납장 상판에 유리 대용 커버를 놓고 조리대로 사용한다. ㄷ자 주방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아일랜드 식탁을 기웃거리다가 수납장 방향을 돌렸더니 요리가 수월해진다. ㄷ자가 아니고 등호(=) 모양이고 크기도 참 작지만, 요리하다 뒤로 반만 돌면 닿는 조리대는 최적의 동선을 선사한다.  


 작은 부엌일수록 미니멀해야 한다.

 꺼내 놓고 쓰면 편하다. 아기자기한 주방 용품이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하는 것도 안다.  그러나 1부터 100까지 모두 필요하다며 늘어놓기 시작하면 조리할 공간은 사라진다. 공간이 없으면 요리할 의욕이 사그라든다.  싱크대 위,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의 개수를 줄여보라. 조리도구, 조미료, 수저통 이런 것들도 넣어두고 써도 불편하지 않다. 작은 공간에서는 몇 개만 올라와도 훅 좁아지고, 반대로 한 가지만 치워도 그 공간이 요긴하다. 

왼쪽은 싱크대 서랍장 내부, 오른쪽은 오늘의 부엌


 미니멀 부엌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늘 사용하는 것을 '미니멀 인테리어'를 위해 불편하게 꺼냈다 뺐 할 필요도, 인테리어 작업을 마친 듯사용감 하나 없는 반짝이는 부엌일 필요도 없다. 에서늘어놓고 무언가를 해 먹는다는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  뭐가 이렇게 나와 있는 게 많냐며 한숨이 나오고 조리할 공간이 부족해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동선이 꼬이며 불편하지 않으면 된다.  단순할수록 편하다 느껴지면 점점 미니멀한 부엌으로 가꾸면 되는 거고, 난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거기서 멈추면 된다. 어떻게든 몸을 덜 움직이고 에너지를 덜 쓰는 편한 부엌살림을 추구하는데 부엌이 작다 보니 미니멀한 부엌이 그 방법이 된 것뿐이다.


 요리를 엄청나게 잘할 필요도 없다. 나는 과일이라도 깎으려고 하면 옆에서 "줘봐, 내가 할게"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칼질을 못한다. 그래도 엉성한 칼질과 날렵한 스텐 가위질로 쉽고 내 몸 편한 요리 위주로 잘해 먹고 산다. 요리 프로그램처럼 프라이팬에 뿌 식용유 하나, 설탕 하나 일일이 다 예쁜 그릇에 옮겨 담아 조리하고 플레이팅 하는 건 안된다. 무조건 쉽고 편하고 설거지는 적어야 한다.


 작아도 편하고 효율적인 동선을 누릴 수 있는 부엌에서 요리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

 너무 애쓰지 않는 단순한 부엌,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전 05화 '호텔 같은 집'의 관리인인가요, 투숙객인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