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 가구와 가전만이 그 자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자리에 각 잡혀 놓여 있고, 여기저기 놓인 자질구레한 현실 생활 용품은 없다. 텅텅 빈 수납장엔 며칠 묵을 때 꼭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가지런히 들어있다. 작지만 깔끔한 주방에는 최소한의 개수의 주방용품만 있다. 막 체크인할 때의 호텔 상태처럼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는 깔끔한 모습의 집. 예전의 내게 호텔 같은 집의 정의였다.
전에 살던 집은 신축아파트의 고층이었다.전망이 대단히 좋았고 근처에 놀러 갈 곳도, 맛집도 많아 주말에 가족과 지인들이 자주 놀러 오고 종종 자고 갔다. 공간은 넓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어 오는 이마다 호텔 같다 했다. 이사 직전에는 너무 휑해서 템플 스테이가 되었지만 아파트 이름을 따서 00 호텔이라고 불렸던 우리 집은예약이 겹치지 않게 스케줄을 조절해야 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작은 집으로 이사 가면 앉을 데가 없어 서서 밥을 먹어야 할 거라며 호텔 영업 종료를 아쉬워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런 호텔 같은 집의 투숙객이 아닌 관리인이었다는 점이다. 깔끔한 호텔을 유지하려면 퇴근하고 돌아와서도 쉴 수가 없었다. 늘 정돈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쉴 새 없이 치웠고 밖으로 나온 것 없게 틈틈이 재고 정리를 하며 불필요한 물건을 솎아 냈다. 욕실 두 개를 물 때 하나 없이 관리하기 위해 주말 아침마다 화장실 청소를 했다. 주말에 손님들이 온다고 하면 매번 더 신경을 써서 청소를 했고, 손님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청소를 했다.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관리인을 자처했다.
나도 호텔 같은 집을 원했다. 호텔에서는 뭔가 모르게 마음이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건 깨끗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완벽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서였다.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순간이 언제였나 스스로에게 물으면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한 번에 두 개 이상을 한 순간은 바로 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멀티가 벅차고 할 수 있어도 하기 싫었다. 그냥 한 가지만 느리작 거리며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안 하기'를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가만히 쉬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정리할 것이 보이면 반사적으로 치우고, 필요 없는데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게 보이면 무의식적으로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호텔에 가면 그냥 그대로 두고 쉴 수가 있었다. 특별히 다른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밖에 나가 밥 사 먹고 들어와서 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낄낄거리고만 있어도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 호텔에 온 목적은 쉬는 것이고 쉬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자체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의 마음을 그렇게 편하게 해 온전히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전 집이 럭셔리한 대형 룸이었다면 깨끗하고 최소한의 가구와 가전이 있으며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지금 집은 아주 작은 호텔룸이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 비로소 나는 투숙객이 되었다.
작은 집에서는 공을 들여 집안일을 무시한다. 공간은 나를 위한 것이지 공간을 위해 내가 힘들면 안 된다고 주야장천 외치며 여기저기 보이는 일을 모르는 척하고 에너지가 생길 때까지 미룬다. 얼른 일어나서 하고 말자 했다가도 '힘들면 우선 쉬자' 하면서 애를 써서 앉아 있다. 피곤하면 세탁물 건조가 다 됐다고 알람이 울려도 내버려 둔다. 좀 구깃거려도 입으면 또 다 펴진다.
여행이 별 거였나. 어딜 가든 맛있는 것 사 먹고, 맛있는 커피 사 먹고 호텔에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하고 똑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쉬는 거다. 그것이 휴가고 호캉스다. 지금 여기서 그렇게 지낸다. 집은 쉬는 공간이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게 우선이라며 쉬는 데 집중한다. 관리인모드는 최대한 줄이고, 대부분은 여유로운 투숙객 생활을 즐긴다.
좁아서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호텔 영업도 재개했다. 벌써 몇 팀이 다녀갔다. 작은 집은 의외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거실의 테이블을 창가로 붙이면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부엌이 작아 여러 사람의 음식을 해 먹고 치우기는 버겁지만 여행지에서처럼 근처 맛집에서 밥을 먹고 집에 와 같이 보드 게임하고 놀다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은 거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맥주 한 병씩 마신다.운전 걱정 안 하고 지금 몇 시인지 신경 안 쓰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잠드니 하루가 보람차다. 호텔 크기는 많이 작아졌지만 투숙객들은 쾌적하고 만족스럽단다. 무엇보다 혼자만 관리인이었던 나도 이곳에서는 투숙객이 되어 함께 즐기니 다 같이 여행 온 기분에 몹시 신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