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평을 줄여 가는 이사. 이제 물건이 고장 나면'이제 버릴 때가 된 거지' 하며 고민 없이 버릴 수 있으니 오히려 수월한 지경에 이른다. 새로운 것으로 업그레이드, 이런 건 없다. 나는 아주 확고한 마음으로 종류를 망라한 엄청난 양의 물건을 비워낸다.
그런데오디오가 고장 났다. '고장 났다'보다는 '고장 나 있었다'가 더 정확하다. 오랜만에 CD가 듣고 싶어서 넣었는데내가 좋아하는 CD 읽히는 소리가 안 난다. CD 보관함도 아닌데 안에 머금고만 있다. '아, 이건 안되는데' 소리가 나온다. 수리를 알아본다. 기사님은 이미 오디오는 단종된 데다가 삽입용 CD리더기 자체를 구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 설령 구할 수 있다 해도 블루투스 오디오 새로 사는 것과 가격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신다.
블루투스 스피커는 있다. 게다가 주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CD 들은 것이 이미 몇 개월 전이다. 유일한 CD 플레이어가 고장 난 김에 부피 큰 오디오도 버리고 이사 때마다 끌어안고 다니면서 케이스에 금이라도 간 게 보이면 속 쓰려하던 CD들을 처분하는 거다. 작은집에서 오디오와 CD장만큼의 공간이 어디냐. CD를 가지고 가려면 CD플레이어가 되는 오디오를 또 사야 하질 않는가. 비워야 한다. 가장 이성적이고 경제적인, 현명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보통 록 듣다 재즈로 넘어갔다 클래식에 종착한다는데 나는 록에서 멈췄나 보다
CD장 앞에 앉는다. 이미 많은 CD를 버리고 추리고 추려서 남긴 작은 수납장 하나다. 딱 여기에 들어가는 만큼만 유지하자면서 CD 한 장을 살 때도 정말 신중하게 구매했다. 그렇다. 미니멀 라이프에 근접해 가는 와중에도 아주 아주 간혹이었지만 더 사서 모으기까지 했다
CD를 모으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전까지 테이프를 들었는데, 가장 좋아하는 록그룹의 테이프가 너무 많이 들어 늘어지자 예민한 귀가 참지 못하고 '반영구적인, 원음에 가장 가까운 음질 보전'을 보장한다는 CD를 사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용돈을 따로 받지 않았던 나는 정말 어쩌다 한 번씩만 CD를 살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본격적으로 CD를 모았다. 그때 나는 록음악에 빠져 있었는데, 유행하는 가요나 보이밴드 음악은 상업용 음악이라며 듣지 않고 꼭 록음악만 들었다. 부끄럽다. 솔직히 시끄럽다는 느낌이 들어도 굳이 데스메탈까지 참아가며 들으며 그때 말로 '후까시'를 잡고는 했다. 그때는 CDP 들고나갔는데 안에 CD가 없으면 마치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눈에 처음 보이는 레코드 가게에서 CD를 꼭 사고 그랬다. 그 당시 CD 대여섯 장씩 쓱쓱 골라 사 가는 어른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처럼 느껴졌다.
새 CD를 사서 겉 비닐을 벗기고 뻑뻑해서 잘 열리지 않는 케이스를 연다. 혹시나 지문이라도 묻을까 봐 CD 가장자리를 잘 잡아서 플레이어 넣으면 CD를 읽으며 나는 '쉬익'소리에 명치가 찌릿할 만큼 설렜다. 음악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앨범 재킷을 빼서 앨범 소개 내지는 평해놓은 그 글을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정독했다.
내가 사모으던 록그룹 앨범 재킷에 담긴 글엔 특유의 기승전결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뭔가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그룹을 소개하고 칭찬을 하다, 주로 2집 이상부터는 '실험 정신은 줄고 상업성과 타협했다' 류의 비판 한번 해주고, 그러나 이런이런 면에서 선방했다는 식. 그리고 마무리는 시적멘트 한 줄. 그리고 그리고 중간중간 음악 관련 용어는 모두 영어로. 나는 예나 지금이나 중간중간 단어만 과하게 영어로 쓰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그곳에서만 뭔가 전문가의 느낌이라며 '가오가 난다'며 동경했다.(그 당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꾸 그때 용어가 나온다)
그때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나는 CD를 모았고, CD 안쪽에는 구입한 날짜와 장소를 적어놓았다. 해외에서까지 사모았다.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 10%씩은 꼭 CD를 사서 벽 하나를 CD로 채워야지'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어가며 내가 록 음악의 계보를 정리하겠다며 도서관에서 책들을 뒤지고, 어두침침한 음악감상실에서 병맥주 들고 헤드뱅잉을 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정말 큰 마음을 먹는다. 블루투스 연결 한 번이면 똑똑한 스트리밍 서비스는 내 취향에 딱 맞는 음악을 무한정 재생해준다. CD는 계속 바꿔가며 들어야 하지 않는가! 비우자.
중고 판매가 번거로워 대부분 기부로 물건을 비우는데, CD는 기부가 불가능한 물품이다. 한정판 CD라 정말 힘들게 구한 건데 알*딘에서는 500원에 구입한단다. 그렇다고 한 장 한 장 올리면서 팔기에는 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다. 헐값에 처분하느니 차라리 버릴까 하고 CD들을 꺼내서 쇼핑백에 일단 담아뒀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CD장에 꽂는다. 신발을 더 버리고 신발장에라도 CD를 넣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나서야 다시 자러 간다.
계속되는 나의 CD 고민을 가족 단톡방에 묻는다. 나의 '작은집 이사' 스트레스를 함께 하는 가족들은 오디오와 CD 모두 비워야 한다는 답을 확인해 준다. 그런데 마음이 이건 답이 아니야! 한다. 곧 30년을 바라보는 친구는 '그걸 눈에 밟혀서 어떻게 버리냐'라고 답을 해온다. 역시. 이것이 정답이다. 이럴 거면 뭐하러 물어보냐. 일단 가지고 가서 어디든 넣어보자고 합의를 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나도 잘 안 챙기는 모든 기념일 명분을 끌어모아 친구는 CD 플레이어가 있는 올인원 오디오를 선물로 보내왔다. 전에 있던 오디오보다 더 크다. '아 , 크다' 이러면서 덩실덩실 깨춤을 춘다. 오디오를 세팅하고, 처음 산, 가장 좋아하는록그룹 CD를 넣고 바로 앞에 앉아 음질을 확인하는데, 아. 예전 그때처럼, 명치가 찌릿해 왔다.
나는 잘 버린다. 추억의 물건도 가차 없다. 작은 집에서는 물건보다 공간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내가 한 장 한 장 모았던 CD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가장 의욕이 넘쳤으며,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내던 그 시기의 나와 공유하는 유일한 물건이다. 그렇기에 큰 오디오와 CD수납장은 지금 15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집에 건사해 있다.
스마트폰 안 플레이리스트에도 음악은 많다. 앨범 중 좋아했던 음악들로만 채워져 있다. 하지만 앨범 하나를 통째로, 건너뛰지 않고 듣는 정성이 나는 좋다. 틈틈이 ABC순으로 정리해놓은 CD를 차례대로 꺼내 1번 트랙부터 꼼꼼히 듣는다. 취향이 변하며 아 이 트랙이 이렇게 좋았나 싶은 새로운 발견도 한다. 손 끝이 살짝 떨릴 만큼 기쁘다. 내 마음이 이렇게 벅차게 좋다. 앨범 재킷도 꺼내서 글도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