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성미니멀 Apr 20. 2023

고생 하나 안 하고 살았나 보네

 언젠가부터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내 나이가 몇인지 숫자로 들으면 흠칫 놀라게 된 그즈음부. 나보다 나이가 적은 것 같다, 많은 것 같다 이 정도만 가늠한다. 심지어 그것도 틀리는 경우가 왕왕  한참이나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한 그 사람이 나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애써 모른 척 해온 나의 나이 듦을 절감하곤 한다.


 어릴 때 유난히 성숙한 외모를 자랑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개교기념일이었을까. 평일인데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날에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 6명이 모였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방탕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우리들은 용돈을 탈탈 털어 간식을 있는 대로 사서는 친구 집에 모였다. 아무래도 건전하다. 우리가 원한 것이 이것이 아닌데.  시 야한 영화의 상징, 청소년 관람 불가 '원초적 본능'을 보기로 합의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신기해할 비디오가게라는 곳에서 빌려오는 관문이 있다. 키도 크고 뭔가 어른의 이미지를 풍기던 친구는 자진해 임무를 맡는다. 최대한 늙어 보여야 한다며 집안에 있던  옷가지와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긴장한 마음으로 출동했는데 단 한 번의 의심이나 질문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비디오를 내어주는 모습을 저 멀리서 관찰하며 우리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웃어댔다.


 대학교 동기 중 하나도 그랬다.

 재수를 하지 않은 '현역'이었는데 선배들은  참으로 공손하게 몇 수를 하셨냐 물어왔고 강의시간마다 교수님들은 '자네는 이번에 복학했나?'물으셨다. 그 친구는 그러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중학교 때부터 이 얼굴이었다며 나중에 나이 들어 만나도 너희들은 팍삭 늙어있겠지만 자기는 아마 이 모습 그대로라며 자신했다.


그의 말처럼 40대의 그는 되려 '어려 보이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비디오를 구해 준 그녀가 '동안'으로 불리는지는 히키코모리가 된 지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길여 여사와 동창들
이미지출처 위키트리, 뉴시스

 어릴 때는 끽해야 동안이다, 늙어 보인다 이 정도였는데 갈수록  외모로 드러나는 나이의 차이가 현격해진다.


 가천대학교 초대 총장 이길여 여사가 동창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위 사진이 한때 인터넷을 달궜다. 동창인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동창분들은 잘못이 없다. 저렇게 딸처럼 보이는 이길여 여사가 1932년생이라는 정보를 퍼 나르며 감탄과 경악의 댓글들이 더해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90살은 호호 할머니인데 어찌 이분은 나보다 얼굴에 주름이 더 없는가. 확대를 해 가며 봐도 머리숱도 나보다 많은 것 같. 충격에 휩싸였다.


 엄마 친구 딸이자 나의 친구인 E의 결혼식에 엄마와 함께 참석한 10여 년 전, 엄마 친구 아홉 이  모인 테이블에 나 혼자 껴 앉아 그들의 몇십 년 세월이 응축된 대화를 들으며 앉아 있다.

 한 학년이었다는데 열 살  아니 그 이상도 차이 나 보인다. 마음속에 담아 두는 것 없이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저분은 약간의 시술 덕도 있겠지만 정말 어려 보이신다. 대화로 유추해 보니 태생도 부유했는데 현재도 부유하게 살고 있으신가 보다. 어쩐지 얼굴에 고생의 흔적이 안 보이더라니.

 화장을 했음에도 근육과 피부와 그 위의 화장층이 다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 같던 유난히 지쳐 보이는 그분은  한동안 아프셨단다. 그녀의 모습에서 그간의 고되고 힘든 세월이 보였다. 그 와중에 엄마가 어려 보이는 쪽에 속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어느 순간 다른 이의 겉모습과 행동과 표정을 보고 그의 현재는 물론 과거까지를 짐작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저 혼자 추측이지만 예민함 덕인건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 때문인 건지, 아니면 경험이 쌓일 시간을 이미 많이 지나 온 탓인지 사실과 상당히 근접해 간다.


그럴 때마다 지금 나를 보는 저 사람에게 나는 평안함이 묻어나는 모습이길 바라게 된다.

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삶에 찌들지 않은 여유 있고 편안한 모습이 되고 싶다.

누군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고생 하나 안 하고 살았나 보네' 싶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