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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May 24. 2022

체대 나온 엄마가 된 썰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은 한다만 히키코모리가 체질인 나에게는  흔한 조리원 모임, 어린이집 엄마 모임, 유치원 엄마 모임 하나가 없다. 있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도 아니고 애초에 없었다. 수록 사람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같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햄버거 가게에서 누군가 말을 건넨다. 아이와  같은 반 친구 엄마란다. 이를 보니 알 것도 같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아, 00 엄마, 혹시 체대 나오셨죠?"

 앞에 혹시는 붙어있으나 뒤에는 이미 확신이다. "엥, 아니요 허허..."하고 웃으니 그분 말씀이 "어머, 우리는 운동회 때보고 분명 저 엄마는 체대 나온 엄마다 했는데."

@pixabay

 유치원 운동회는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학급 수가 많았는데 한 아이당 부모에 조부모까지 참여한 집이 많아 이렇게 큰 곳을 대여했던 장소가 꽉 찼다. 초빙한 전문 사회자는 또 어찌나 맛깔나게 진행을 하는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다.


 학창 시절 나는 운동회, 체육대회 때마다 철저히 방관자 모드다. 어떻게든 선생님 눈길을 피해 저 뒤에 앉아 몰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처음 참여하는 아이 운동회에 차마 럴 수는 없었지 '엄마들 나오세요~'가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가 하며 몇 번을 좀비처럼 나갔다가 멀뚱멀뚱 서있다 오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신기하지만 감사하게도 부모 누구에게도 없는 뛰어난 운동신경을 지닌 아이는 이어달리기 대표로 나가서 1등을 하겠다며 운동회를 한다는 가정통신문을 받아온 날부터 설레했다. 달리기 실력으로 선수를 뽑면 당연히 거라 자신했던 아이는 그러나 당일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출전하지 못했고 아쉬움에 나오는 눈물을 계속 닦으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엄마들 모두 나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아이를 달랜다는 핑계로 버티다 마지막에 선생님에게 걸려 두 줄로 길게 선 줄  우리 팀 가장 뒤에 서게 됐다. 학교 다닐 때를 소환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앞에서부터 커다란 훌라후프를 한 명씩 연속해서 통과해 줄의 맨 마지막 사람이 뛰어 무대 앞에 먼저 도착하는 팀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아... 망할...


 마지막으로 뛴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다. 100m 달리기 기록은 그래도 좋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그때가 언제냐고. 아이 학교 운동회 때 반 대표로 나갔다가 지는 바람에 반에서 역적이 되었다는 직원 이야기가 머리에 스친다. 안 그래도 속상한 엄마 때문에 우리 팀이 졌다 하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나는 운동화 끈은 고쳐 묶었다.  


 훌라후프 통과는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였다. 심장은 두근거리는데 앞에서 자꾸 걸리는 바람에 아주 천천히 이동한다. 양쪽 거의 비슷한 속도로 오던 훌라후프가 아뿔싸 내 바로 앞에서 계속 걸린다. 이미 상대팀 주자는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훌라후프를 통과했을 때 이미 옆 주자는 반 도를  상태.

 체력장 도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 임하지 않았. 뛰자마자 바로 허벅지 근육이 뭉치는 게 느껴질 만큼 전력질주를 다. 저 멀리 보이던 옆 주자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양 옆으로 스쳐가는 두 줄로 선 엄마들이 앞에 가는 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엄청나게 소리를 질렀고 우리 줄의 엄마들은 나를 향해 힘차게 팔뚝질까지 하며 응원의 환호성을 질렀다. 옆 주자가 무대 가까이 가며 두 팔을 흔들면서 승리를 만끽하려는 순간 내가 그녀를 제치고 먼저 띠를 끊었다. 그제야 두 줄로 선 엄마들 말고도 운동장에 가득 찬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는 것을 다. 운동선수들이 '러분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납니다"했던 것이 팬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나를 깨닫는다. 주저앉을 것 같이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도 잘 못 쉬고 헉헉 거리면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을 느낀 순간이다.


 의도치 않게 이렇게 극적인 경기를 펼치다니. 진행자는 선수 출신 엄마를 데려오면 어떡하냐며 너스레를 다. 후끈한 분위기 속에 옆 주자와 악수를 나누고 선물까지 받아 들고 박수를 받으며 절뚝거리면서 자리로 왔다. 내가 달리는 걸 처음 봤을 가족들은 너네 엄마 엄청 빠르다며 박장대소를 했고 계주를 못 뛰어 속상해하던 아이는 신이 나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우리 엄마 최고'를 외쳤다.

 

 운동회를 마치고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는데 아이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어머, 어머니~ 00가 어머니 닮아서 승부욕이 있었네요!"

 내 평생 승부욕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는구나. 칭찬 같은데 창피하다. 자그마치 4일을 허벅지와 발목 군데군데 파스를 붙이고 '삭신이야'를 염불처럼 외며 출근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날이 우리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이었 것이다.


 유치원 엄마들은 아직도 나를 체대 나온 엄마로 기억하겠지. 그것도 다. 언제  체대 나온 엄마가 되어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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