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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Aug 29. 2023

30평 아파트 탈탈 뒤집기

'에메랄드 빛 바다'라는 것을 처음 실감한 태국 파타야의 섬에서 바나나보트에 도전한다.

탑승 전 설명을 해주는 현지 운전사의 언어 능력에 감탄이 나온다. 기본은 영어다. 단어 단어만 나열하고 be동사 이런 건 없다. 중간중간 한국어도 있다. 두 개 언어의 연결이 아주 매끄럽고 이해가 몹시 잘 된다. 신기하다. '마지막에 보트를 세게 꺾을 텐데 물에 빠져도 놀라지 말라'는 내용까지 완벽하게 전달이 된다.

 

 네 명 중 제일 뒷자리. 엄청 빠른 속도에 곧바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자기 방향을 트는 순간 손잡이를 놓치고 날아가 물속으로 훅 빠졌다 떠올랐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지나가던 다른 배에 겨우 구조(?)되어 해변으로 오니 나를 보고 안심을 한 가족들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기 시작한다. 의도한 지점에서 확 커브를 꺾어 사람들을 떨어뜨린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고는 네 명이 있어야 하는데 세명만 있으니까 당황해서는 "와이 쓰리?"이랬단다.

 

 어느 날 회사에서 '와이 쓰리' 이야기가 나왔는데 듣고 있던 선임이 묻는다.

 '근데 넌  왜 거기서 떨어진 건데?'

 오호라. 신기한 관점이다. 나는 왜 거기서 떨어졌는가 처음 고민해 본다. 악력은 좋은데 팔에 근력이 없어서 그랬나. 그러다 내가 왜 원인을 찾고 있나 싶은 거다. 혼자 다른 데서 떨어진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는 그 지점이 다른 이들의 마지막 커브처럼 힘들었을 뿐이다. 


 힘든 포인트까지 다 같을 수는 없다. 남들 보기 다 쉬워도 나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너는 여기서만 떨어져야 해. 다른 곳에서는 떨어지면 안 되는 거야' 하안 되는 거다.


 살림 사람마다 분야가 다르다.

 딱히 닮은 건 모르겠는데 멀리서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 '이게 나인가?' 하는 자매님은 요리에 능하다. 냉장고 속에 들어있던 재료들로 네다섯 개의 메뉴를 계량스푼 한 번 안 쓰고 뚝딱 만드는데 대단히 맛있다. 반면 나의 요리 실력은 참으로 우직하게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내가 과일이라도 깎기 시작하면 반응은 한결같다. '줘봐, 내가 할게.'


 그런 자매님에게는 정리가 어렵다. 정리 강의도 듣고 열심히 치우기도 하는데 무언가 어수선하다.

 그녀의 집 상태를 보고 가까운 사람이 독설을 날렸단다. 나는 어릴 때 “누가 우리 언니 울렸어?”하며 뛰쳐나간 마음으로 자매님의 집을 완전히 뒤집기로 한다.  

before

  미리 현관부터 방, 베란다, 화장실, 다용도실, 장롱, 붙박이장 안 모습까지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 보내라 하고 며칠간 사진을 매의 눈으로 들여다보며 가구 배치를 한다.


 목표는 단순하다.

 큰 애 방에는 큰 애 물건만, 작은 애 방에는 작은 애 물건만, 안방에는 부부 물건만, 거실엔 공용 물건, 부엌은 식사에 관련된 것만. 그리고 쉽게 들리지만 참 어려운 그것, '비슷한 용도의 물건은 한 곳에'. 그러려면 온 집안 물건을 다 꺼내 다시 자리를 정해줘야 한다.  

 그날이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장에 꽂힌 책을 다 빼기 시작한다. 쉴 새 없이 '버려, 필요 없어. 버려'를 반복한다. 녹음해 놓고 틀어도 눈치 못 챌 것 같다. 애들 책은 각자 방 책장에만, 거실 책장엔 같이 보는 책과 어른들 책을 두는 걸로 정하고 그 세 개에 안 들어가는 건 무조건 버리기로 한다. 위로 쌓는 거, 없다. 책더미 속에서 버릴 책을 추리고 있는 부부에게 꽂을 것을 추리라 한다. 아무리 말해도 바닥에서 다시 주워오더니 아이들 책 꽂을 자리가 없자 과감하게 버리기 시작한다. ‘청소력’만 두 권이 나왔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네. 두 권 다 버린다. 이것이 진정한 학행 일치다.    


 방이 작아 책장이 들어가면 답답해 보일우려했던 것과 달리 침대와 책상 자리를 바꾸고 벽면에 책장을 붙이자 오히려 짜임새 있다. 큰 책장이 빠져나간 거실과 안방, 생뚱맞게 끼어 있던 책장이 빠진 부엌은 바닥이 발 디딜 틈이 없는 지경인데도 확연히 훤하다. 그런데 밖은 어두워졌다. 제본 책들 스프링을 빼느라 시간이 너무 걸렸다. 아 이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책장을 넣고 오히려 짜임새가 있어진 아이들의 방

 발적으로 매님 집에서 이튿날을 맞는다.

 구석구석 수납공간이 많아 좋다 했는데 거기서 물건들이 쏟아져 나다. 이사 온 날 넣고 처음 꺼내는 것들이 등장한다. 쓰려고 찾으면 안 보여서 매번 새 걸 뜯은 쓰다만 옷 먼지 제거 롤 네 개, 물티슈는 여섯 개가 나왔다.


 최대 난제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추억이 담긴 아이들 물건. 사진이라도 박혀있으면 나도 어다. 하지만 추억을 보관하는 것보다는 깨끗하 정리된 공간을 지금 선물해 주는 걸 택다. 심혈을 기울여 몇 만 추다. 그 어려운 작업을 마치 나머지는 이제 고민할 거리가 되지 않다. 버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나오는 족족 종량제 봉투와 분리수거장으로 직행다. 종량제 봉투가 채워지는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분리수거장과 집을 왕복한 끝에 나가야 할 물건은 거의 다 나갔다. 책장이 빠진 자리에 식탁을 붙이니 부엌이 확 넓어진다. 잡다한 것들이 놓여있던 나무 수납장은 고급 장식 본연의 모습을 찾다. 가구마다 덮여있던 물건들을 걷어내니 자매님 취향의 클래식한 가구들의 진가가 드러난다.

아이들 방에 딸린 베란다도 모두 정리한다. 거실 수납장은 종류별로 모아 분류한다. 현관 앞을 비워 물건을 올려놓을 기회를 차단한다

 체력은 둘 다 완전히 바닥났다. 하지만 집은 너무나 크게 변해 있다. 우리가 손을 댄 곳들엔 빈 공간이 생겼고 표면이 보이며 단정해졌다. 바닥에 아직 쓰레기들이 쌓여있는데도 이미 집은 더 커져있다. 정말 거의 다 했다. 이왕 시작한 거 부엌까지 하면 진짜 완벽한 집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저녁이다. '부엌을 손대면 오늘도 집에 못 가는데' 하면서 상부장을 연다.


 부엌은 마법의 공간이었다. 싱크대에 그렇게 많은 물건이 들어가는 줄 몰랐다. 이사 와서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그릇, 물병, 플라스틱 용기들이 구석에서 나다. 분리수거장은 더 안 가도 될 줄 알았는데 또 간다. 그곳에 쌓인 물건 3분의 1 이상이 자매님 집에서 나다.

 주방 정리를 마치니 갈색이 된 스텐 냄비들이 거슬린다. 자고로 스텐은 반짝반짝 윤이 나야 맛이지. 물 끓여 과탄산 부어 떼를 벗겨내고선 냄비에서 광난다고 둘이 짝짝거리며 좋아한다. 새벽 한 시 반이다.   

책장을 비우고, 피아노 커버 등 겉으로 나와 있는 모든 것을 치우니 비슷한 색으로 통일한 집 가구들이 빛난다

 3일째 아침,

  마무리하고 쓸고 밀고 닦고 하니 자매님 집이 이렇게 넓었나 싶다. 아무것도 없는 빈 바닥에 들어온 햇볕 위잠깐 누웠는데 둘 다 허리가 잘 안 펴진다. 내 인생에서 이 정도 강도의 신체 노동은 처음이다. 정리 업체에서도 수명이 수일간 작업해야 할 양이었을 거다. 

 그렇게 2박 3일 만에 자매님 집에서 나왔다. 노동 후 성과가 이렇게 혁혁한 적이 또 있었을까. 구부정하게 인사를 나누며 뿌듯하고 기쁜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나서 우리는 아무리 씻어도 까매진 손으로 눈가를 계속 질렀다.

책장의 책은 높이를 맞춰 꽂는다. 집 안에 한 군데, 빈 벽을 만들어 둔다. 부엌에서 책장을 빼내니, 훨씬 넓다

  내 주변을 보면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정리가 조금 빠지고, 정리를 잘한다 싶으면 요리가 좀 쳐진다. 신기한 건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난 요리를 못해서 그냥 사 먹는 게 편해' 이러고 마는데 정리를 못하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리를 해본다고 수납 바구니를 잔뜩 사고 책에서 배운 대로 물건을 싹 다 꺼냈다가 끝을 못 내고 그대로 돌돌 말아 집어넣는 등 지속적으로 노력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다.


  하필 '정리'라는 건 가시적으로 확 드러난다는 게 문제다.

 칼질만 시작 안 하면 숨길 수 있는 나의 요리 실력과 달리 '정리'는 그 사람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있다. 남이면 집에 안 부르면 되는데 가족들에게는 그것도 안된다. 맛있는 요리를 해서 식탁에 올리면 15분도 채 안 돼서 다 먹지만 요리하느라 어질러진 싱크대는 내내 보인다. 

 정리는 대체도 힘들다. 매식은 배달까지 되는데 로봇청소기 등 가전제품이 쓸고 닦는 품만 덜 뿐 정리는 사람 몫으로 오롯이 남아다. '정리도 외주를 주면 되지-'라고 할 수 있지만 가끔 외식하는 것과 사람 이모님을 쓰는 것이 같은가. 쉽지 않다. 정리 업체 비용은 더더욱 만만치 않다.


 내게는 정리유전자가 없어 정리가 어렵다고 스트레스받지 말자.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하는가? 그냥 어려운 포인트가 다른 거다. 기력도 없는데 어질러진 것들로 마음만 답답하다면 눈앞에 나와있는 거 싹 걷어서 장롱 안에 몰아넣고 에너지가 생길 때까지 문 아 놓자.


 평수를 줄여 이사를 가게 되어 걱정만 하 있다거나 작은 집에서 조금만 더 넓게 살고 싶은데 정리가 안되어 힘들다면 그건 당연한 거다. 나처럼  하는 분야가 정리인 사람에게도 작은 공간은 쉽지 않다. 전부 다 미니멀 라이프 할 필요도 없고 작은 집으로 이사 간다고 애장 하는 물건까지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게 맞는 것만 취하면 되고, 아니면 그냥 남의 집 사진만 구경해도 되는 거다.


 이 글을 보며 '나는 정리도 안되고, 요리도 안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있는 것 자체로도 칭찬받아 마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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