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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ul 24. 2023

20평을 줄여 이사 왔다

 이사 차량 안에서 짐들이 새끼를 친 걸까.

 

 휑한 아파트를 보며 일찍 끝나겠다며 좋아했던 이사업체는 작은 집에 와서 더 이상 넣을 데가 없다며 난감해한다.  바닥은 진작 사라졌는데 이사 박 계속해서 들어온다. 이곳의 수납장은 개수만 적은 게 아니라 크기도 작다는 걸 계산 못했다. 붙박이장 한 칸 폭이 좁다. 서랍 깊이도 얕다. 심지어 천장까지 낮다. 작은 집이란 이런 거구나. 모든 것이 작다. 아기곰 의자에 앉은 골디락스가 된 기분이다.


 이사가 끝났다는데 세면대 안에는 두루마리 휴지들이 예쁘게 들어있다. 수납박스들은 바닥에 줄줄이 놓여 있다. 매트리스는 붙박이장 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부엌상판에는 빈틈이 없다.


 이 정도 작은 공간쯤 금방 정리하겠지 하며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간발의 차로 수납 박스 모서리가 걸려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 넣었던 걸 다시 빼 저기 넣기를 무한 반복한다. 일단 밖으로 나와있던 것들을 최대한 안으로 집어넣고 '포화'의 사전적 의미를 오감으로 체득한다.

이사업체가 떠난 직후

  이사 초반.

 작아진 공간의 크기를 계산하지 못하고 휘적휘적 다니다 자꾸만 가구에 부딪친다. 집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몇 발짝 뒤로 무르니 벽에 닿는다. . 이래서 작은 집 사진 찾기가 힘든 거였구나. 역시 사람은 경험한 것만 알 수 있다. 뜬금없이 깨닫는다.


 집집마다 있는 침실이 없는 우리 집. 사람이 쓰기도 부족한 자리를 침대에게 그리 많이 내줄 수는 없다.

 밤마다 이부자리를 깔고 아침마다 갠다. 귀찮다. 그러나 이불이 있으면 붙박이장 문이 안 열린다. 집이 다는 건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10분 간격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누워 있기를 20년 가까이했는데 알람 음성을 '일어나서 이불 개야 회사 간다'로 바꿔 놓았더니 한 방에 바로 일어난다. 이 정도면 미라클 모다.


 분명 내가 읽은 책들에서는 작은  살면 집안일이 확 줄어들고 시간과 체력이 남는다 했거늘.

 외출했다 겉 가방만 내려 두는 순간 무언가 잡하다. 수건 하나가 바닥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클 일인가. 엌이 좁아 컵 몇 개만 올려놓아도 요리할 때 번잡하다. 싱크볼이 작으니 한 끼 먹은 것만으로도 수북이 쌓인다. 줄어든 용량의 가전은 자주 돌려야 한다. 쉴 새 없이 정리를 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러나 집은 더 간소해진다.

 비우기는 이곳에서도 계속된다. 소비한 것도 있고 쓸모를 다해 버리는 것도 있다. 사를 앞두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렸지만 물건의 존재가 동선을 방해하자 필요함의 기준이 단박에 높아진다. 용도가 겹치는 소가구와 도구들도 비워낸다. 가구가 빠지니 집이 넓어진다. 수납장을 차지하던 여행용 캐리어는 자동차 트렁크 정리함으로 사용한다.  하나 비운 리가 작은 집에서는 요긴하다. 구입에 이렇게 신중했던 적이 있었던가. 물건을 새로 들여 느끼는 기쁨보다 비워낸 공간에서 얻는 만족이 더 커지는 날이 내게도 오는구나.


  초반에 의심을 품었던 작은 집의 장점을 하나씩 발견해 간다.

  에어컨을 틀면 순식간에 공기가 식어 고슬거린다. 겨울에는 아담한 공간에 온기가 오래 유지된다. 관리비와 유지비는 평수에 비례해 1/3로 줄어들었다.

  청소기 들고 온 집안을 밀어도 주행 거리가 짧다. 특히 걸레질할 때는 이 정도 사이즈가 딱이다 싶다. 늘 치우기 힘들었던 화장실 구석까지 샤워 물줄기가 닿는다. 두 개의 화장실을 치우느라 주말 오전을 반납했던 이전과 달리 어쩌다 한번 청소로 충분하다.

  큰 집에서 모니터냐고 종종 의심받던 텔레비전은 의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니 실감 나는 화면을 선보인다. 집안쓰레기통 하나만 놓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오디오 볼륨을 조금만 키워도 서라운드 시스템 안 부럽다. 많은 가구를 비웠지만 다기능을 하는 몇 개의 가구로 커버가 가능. 다음 활동을 위해 사용 직후 바로바로 정리하는 습관까지 덤으로 얻는다.

 부분의 생활을 보내는 거실과 방과 부엌의 경계가 모호한 주 공간은 공부방과 레스토랑, 카페의 역할을 상시 수행한다. 작고 단정한 공간만이 가지는 아우라 덕에 주말에는 스터디카페도 됐다 보드게임방이 되었다 만화방도 됐다 하며 변화무쌍 역할을 해낸다. 집 안 어느 한 공간 허투루 쓰이는 데가 없다. 수시로 치우긴 하지만 조금만 파닥거리면 금방 깨끗해지니 부담이 없다.

 20평 줄여 이사한다고 큰 일 나지 않는다.

 집이 작다고 가구를 머리에 이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서 까치발로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서서 밥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미니멀리스트가 도 않는다.

 여전히 내게 필요한 물건은 지니고 용도가 생기면 새로 들이기까지 한다. 배치를 달리해 공간과 물건을 다용도로 활용하고 필요의 기준이 보다 엄격해졌을 뿐이다. 간증하건대 집이 준다고 물욕이 저절로 사그라드는 게 아니었다.


 40을 넘기며 야속하리만큼 급속도로 줄어드는 나의 기력을 보며 가끔은 집이 작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 자신과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쏟기만도 부족한 에너지를 집안 청소와 정리로 소진할 뻔했다.


 여전히 경계성 미니멀인지라 작은 집을 예찬하며 집을 더 줄이는 걸 꿈꾸지는 못하겠다. 더 큰 집으로 갈 수 있으면 갈 테다. 

 그러나 지금 작은 집에서 몸도 마음도 더없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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