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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Apr 25. 2024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든 날이 옵니다

"당신도 언젠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든 날이 옵니다."

 20년까지는 되지 않았을까. 아주 오래전 지하철 역사 내 보수 중인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마주한 안내문의 일부.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의 무지에 깜짝 놀랐던 순간의 기억은 또렷하다.


 상하행 두대의 에스컬레이터를 순차로 수리하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에스컬레이터를 모두 하행으로 운영하겠다는 직전 안내에 민원이 빗발친 모양이었다. 올라가는 것이 훨씬 힘든데 왜 하행을 운행하냐는 항의에 노인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사 특성상 내려가는 것이 힘든 그들을 위해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가동하겠으니 양해해 달라는 빼곡한 답변 속 한 줄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난간을 붙잡고 걸음마 배우는 아이처럼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발을 디디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가족이 올라갈 때와는 현저히 다르게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며 어쩌다 한 번씩 떠올랐던 그때 그 문장.

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87309


 언젠가 온다는 그날이 내게도 왔다.

 출근길 거쳐야만 하는 지하도 입구에는 상하행 에스컬레이터만 한 대씩 있다. 어느 날 하행 에스컬레이터 옆에 수리 중이니 걸어서 이용하라 안내판이 세워졌다.


 에스컬레이터 걸어 내려 가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까만 세로줄이 빽빽이 그어진 채 멈추어 서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는 것은 아직 50도 되지 않은 내게도 손에 땀이 살짝 날 정도의 긴장되는 일이었다.

 일반 계단보다 한 칸의 높이는 높았고 무엇보다 그 빡빡하게 줄지어 난 요철 덕에 발을 아래로 내딛는 순간 제대로 아래칸과의 차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순간순간 마치 매직아이처럼 계단이 내 쪽으로 솟아오르기도 했다. 앞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오히려 어지러움이 덜할 텐데 나 혼자 길고 까만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자니 단차를 생각하지 못하고 발을 디뎠을 때 심장의 충격을 계단 한 개 한 개 내려올 때마다 긴장하며 대비해야 하는 거다.


다 내려오고 나니 무릎까지 뻐근한 지경. 

깨닫는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힘든 이유가 무릎이 아파서만이 아니었음을. 흐릿한 시야에 계단 한 칸 한 칸의 높이가 들쭉날쭉 움직이는 입체로 다가와 공포심마저 느껴진다는 것을.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이 이렇게도 큰 마음을 먹고 한 칸 한 칸 도전해야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된다.

https://naver.me/5wApTVwH

 원치 않았던 출근길 챌린지는 에스컬레이터 수리가 부품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문으로 교체된 후에도 한참이나 더 지속됐다. 거의 두 달 가까이를 난간을 부여잡고 까만 선의 에스컬레이터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다 또 일부러 멀리 앞을 봤다가를 반복하며 다녔지만 끝내 익숙해진다거나 속도가 붙지는 않았다. 

 수리 안내판이 보이지 않고 저 앞의 사람 뒤통수가 아주 부드럽게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다시 에스컬레이터가 가동되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은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출근하며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https://naver.me/G3JPArTc

 요즘 친구를 만나기만 하면 나이 먹어서 좋은 점이 대체 뭐가 있는 거냐를 토로하고 있다. 

 한 가지 한 가지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나타나던 노화 현상들이 마치 선착순 증정행사에 참여라도 하는 것마냥 우르르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자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분명 직전 글을 쓸 때만 해도 노트북의 글씨는 그래도 선명하게 보였는데 지난 며칠간 급격히 나빠진 눈 상태에 모니터 글자마저 희미하게 보인다. '계단'이라 잘 써 놓고 왜 '걔단'으로 보이는가.

 오래간만에 브런치에서 달아준 '리빙분야 크리에이터'라는 완장에 걸맞게 밝고 경쾌한 작은 집 살림 이야기를 쓰려고 앉았는데 침침한 시야와 흐릿한 글씨에 나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지금은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힘들구나 했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몹시도 힘들어지는 그날도 올 게다. 지금 나의 젊음을 당연하다 여기지 말고 늘 감하며 훗날의 나를 위해 건강에 힘써야겠다. 지금 계단 난간을 잡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을 떼는 이들도 분명 한 때는 계단 두 칸씩을 성큼성큼 올랐다는 것 역시 늘 새겨야겠다.

@PIXABAY

 알지 못했던 노년의 고충을 경험했다고 줄줄이 써놓고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초등학생 일기처럼 다짐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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