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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Mar 11. 2022

다단계 업체에 감금되었습니다

관계도 비웁니다

 대학교 첫 학기 종강을 앞두고 시험 일정이 쭈욱 잡혔는데 나는 시험 후 일정을 쭈욱 잡고 있었다. 이미 다이어리 뒷으로 넘어간다. 그때 수미한테 전화가 왔다. 상업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수미는 친한 언니가 개업했다는 옷가게에서 일을 했다. 장사가 잘되면 언니는 분점을 내고 이 가게는 자기 맡기로 했다며 잠자는 시간만 빼고 일을 하던 그녀는, 두 달 전쯤 전화를 해서는 장사 초반에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막상 자리 잡고 돈 벌리기 시작하니까 쫓겨났다고, 그 언니가 그럴 줄 몰랐다며  '인생'과 '배신'이란 단어를 여러 번 썼다.


 그녀가 다시 시작한 일은 나의 로망이었다. 공연 기획사에서 평소에는 기획 업무를 보조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콘서트 무대 바로 앞에서 흥분한 팬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는 가드로 일한단다.  나는 '부럽다'를 연발했다. 저번에는 OO밴드 전국 투어지방을 다니고 있다며, '사실 음악은 네가 좋아하는데 아쉽다' 했었다.  그녀가 방학 때 혹시 같이 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 돈은 그렇게 많이 안 주는데, 그래도 콘서트 티켓 가격 생각하면 괜찮지 않냐면서 기획 쪽은 거의 자리가 없  빨리 결정해야 한단다, 이번에 이쪽에 발 들이고 방학마다 일하면 취업도 될 거란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다. 이런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다면, 행복할 것 같다. 한 가지 걸리는 건 콘서트 일정 때문에 한 달 정도를 이동하 지낸다는 말이었다. 그것 때문에 안 되겠다 하니  중간에 서울에서 하는 콘서트가 있으면 우선 거기로 배정해달라 하면 되니 일단 도전을 하. 난 용기를 다. 


 출발 전날 만나는 장소를 정하며, 미는 회의 공연장에서는 전화를 꺼놔야 되 연락 잘 안 되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가족들한테 미리 이야기해놓으란다. 몇 번을 다시 풀었다 싼 가방을 메고 지하철 역에서 그녀를 만났다. 버스로 갈아타서도 꽤 간다. 긴장 나에게 다들 취향이 비슷해서 편할 거라며 안심을 시킨다. 그런데 장난은 좀 많이 친단다. 자기첫날 신입생 환영회라고 술 왕창 먹고 게임하다 그다음 날 일어났더니 주머니 속 핸드폰이랑 지갑이랑 싹 다 숨겨놨더라며 지금 주머니에 있는 돈이랑 핸드폰을 가방에 다 넣으라고 코치해준다.


 비슷하게 생긴 빌라로 가득 여기도 저기도 다 똑같아 보이는 골목을 한참 걷다  빌라 지하로 내려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오리엔테이션 있으니 가방을 케비넷에 넣어준다 가져간다. 바로 왼쪽 '교육실'이라고 종이에 매직으로 써붙인 방 문을 열었는데, 그때 '아. 여기, 잘못 왔구나' 깨달았다.


 빽빽이 놓인 책상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앉아있고, 정면여자는 칠판에 커다란 세모를 그려놓고 연신 아래에서 위로 화살표를 그려대고 있었다. 나가려고 하니 쉬는 시간에만 된다며 앉으란다. 여자는 여기서 뭐를 하면 이 등급이 되고 거기서 또 이 등급이 되고 하며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 이름들을 들먹이며 한참 떠든다. 이건 내가 돈을 벌고 싶지 않아도 돈을 벌 수밖에 없는 구조란다. 시간이 지나면 손하나 까딱 안 해도 그냥 통장에 돈이 찍힌단다. 속에서 욕이 나온다.


 쉬는 시간, 수미가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 내 발로 걸어 들어온 문 앞에 나가겠다는 많은 사람과 못 나가게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엉켜있다. 보석 이름들이 하나씩 붙어있는 들에 한 명은 소리 지르고 한 명은 설득다. 수미는 보석 방 하나로 나를 데리고 간다. 자기도 처음에 그랬단다. 정말 화가 났는데 그냥 그 친구 하나 믿고 교육을 받아보니까, 지금은 이 길을 알려준 그 친구가 고맙단다. 자기는 나한테 고마운 게 많아서 보답을 하고 싶단다. 지금 자기를 믿, 평생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살란다. 어디를 봐도 시계가 없다. 제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도 하고 네가 어떻게 이러냐고 소리도 지르고, 이러다가 우리 가족들이 찾으면 어떡할 거냐니까, '연락 잘 안된다고 이야기해놨잖아.' 한.


'아.. 이거구나.' 그때까지는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제야, 그녀가 왜 가방 안에 돈과 핸드폰을 다 집어넣으라 했는지, 가족들한테 연락 안 된다고 말해놓으라 했는지 알았다. 에겐 아무것도 없다.  수업이다. 오늘 여기서 수업을 듣고, 근처 숙소 합숙하본격적으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배운단다. 그 뒷말은 잘 안 들어온다. 숙소에 들어가면 끝이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수미가 계속 저지한다. 거짓말한 건 미안하지만, 를 위한 거란다. 계단과 연결된 문 앞을 남자들이 막아서 있고 나가려던 사람들은 끌려왔다. 내 앞에 등치가 아주 큰 남자마저 몇 번 끌려오더니 "씨발, 나는 너를 믿었다고!" 하고  성대가 아닌 몸 저 안쪽에서 나오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남자들을 밀쳐내  문을 열었다. 글자 그대로 그 '찰나'를 틈타  문 밖으로 나왔다. 반지하에서 땅으로 난 계단을 뛰어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벅지에 쥐가 났다. 계단을 밟고는 있는 건지 감각이 없다. 마치 꿈속에서 도망가려고 해도 땅에 다리가 붙어 움직이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빌라 문을 나서자마자 나온 골목길에서 앞에 가던 그 남자는 차에 치일 뻔했다. 무조건 뛰었다. 하필 앞이 작은 공원 같은 한적한 곳이다.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고 금세 나도, 그 남자도, 내 뒤로 나왔을 다른 한 명도 잡혔다.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남자 '믿었다' 사람과 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수미가 언제 와서는 나를 앉힌다. 그곳에 도망 나온 세명과 잡으러 나온 세명이 짝지어 앉아 있다. 수미는 지갑도 없이 리퍼 신고 어디 갈 거냐고, 여긴 버스도 없고 택시도 안 다닌며,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줄 테니 같이 가서 가방을 가지고 나오자 한다. 옆에 사람이 지나간다.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도와달라 려 했는데, 저 사람도 한 패 같다. 도와준다고 하며  데리고 갈 것 같다. 야기를 듣던 한 명이 반쯤 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부터 손이 덜덜 떨렸다.


 너무나도 선명한 그 지점까지의 기억과 달리 그 뒤 기억흐릿하다. 제발 골목이 끝나고 큰길이 나오길 며, 아보지 않아도 온 몸으로 알 수 있던, 내 뒤에 쫓아오수미와 남자가 갑자기 나를 끌고 갈까 려워하며 갈색 슬리퍼를 신고 계속 걷던 장면, 겨우 택시를 잡아 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 택시 뒤에서  울었던 장면만 기억난다. 


 사기는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크게 당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를 아는 그 사람은 내가 혹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내가 믿을만한 수준으로 만들어 낸다.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고 했으면 나는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의 성과, 취향과 내 이상까지 잘 조합하여 그녀는 나만을 위한 맞춤형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내 손으로 지갑과 핸드폰을 넣은 가방을 그녀에게 건네게 했고, 한 달간 그곳에 갇혀 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 말하게 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나는 수미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후 내게 연락해 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그녀를 보며, 이렇게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그녀가 안쓰러웠고 그 방법을 꼭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그랬다는 게 짠했,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를  딱 끊어낼 수 있단 생각 자체를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드라마틱한 사건 없이 그녀와 나의 관계는 서서히 정리됐다. 그녀를 만나 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고민하는 것들, 내가 요즘 겪는 상황들은 그녀의 그것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말에 방청객 같은 소리는 냈지만, 공감이 되질 않았다. 함께 나눌 공통의 관심사가 없다는 것, 그것은 관계가 정리되는 데에  다단계 업체에 끌려갔던 경험보다도 더 강력한 이유가 됐다.


 의도치 않게 많은 물건 비웠듯, 그녀를 포함 많은 관계들이 비워졌다. 합리적인 판단으로  인간관계를  손절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에게 사람을 만날 시간과 여유 자체가 줄어드니 기회가 생길 때는 정말 꼭 만나고 싶은 사람만을 만났고, 그 수가 적었던 것뿐이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그동안 혼자  쌓아두던 고민 나누고 서로 비슷한 관심사 공감하고, 소리 내서  웃다가 눈물도 글썽했다 하며 끝없 화가 이어지 사람. 우리가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냐고 로 아쉬워하는 사람, 돌아와서는 그동안 쌓뻥 뚫린 것 같으면서 '아 오늘 신났다.  앞으로 또 몇 주 힘을 더 낼 수 있겠다' 하는 기분이 드는 사람들만 만나기에도 내 여유 시간과 에너지는 했다. 렇게 오랜 시간 나니 내 주변에는 자주 만나지 못 카톡만 해도, 언제 볼까 이야기만 해도 기운이 나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들만 남아 있다.


 경계성 미니멀 -의도치 않았지만 미니멀 라이프에 근접해 있다고 자체 판단 중이다. 물건도, 관계도 미니멀한 지금, 나는 매우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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