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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이 Mar 07. 2023

낯선 개학

2023년 3월 2일

이른 아침,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아버님이었다.


에미야? 오늘부터 육아 전업인데, 혹시 잠시 힘들면 연락다오. 삶에 부모 역할이 제일 숭고하다. OO 잘 키워라.


3월 1일 자로 나의 육아휴직이 시작됐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개학하지 않는 3월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만 개학하지 않는 3월이다. 코로나 사태에도 모든 학교가 온라인 개학은 했다. 방학 동안 함께 육아를 해온 남편도 개학을 맞아 출근했다. 하지만 이번 3월은 나만 멈춰있다.




아침 7시 30분. 첫 수유를 마친 아기와 놀아주고 첫 번째 낮잠을 재웠다. 첫 번째 낮잠은 30분 정도이다. 같이 누워 쪽잠을 청하니 금방 아기가 깼다. 다시 놀아주고, 먹이고, 두 번째 낮잠을 재웠다. 그 사이 점심을 후딱 먹고 설거지까지 했다. 평소 두 번째 낮잠은 길게 자는 편이지만, 그래도 언제 깰지 모르니 뭐든 서둘렀다. 역시나. 오늘은 30분 만에 깨버렸다.


다시 놀아주 핸드폰으로 괜히 교사 카페의 '첫 수업 아이디어' 게시판을 기웃거렸다. 개학에 맞춰 평소보다 많은 자료가 올라왔다. 남편에게 아기 사진이며 동영상을 보냈지만 평소보다 답장이 느렸다. 다들 바쁘구나. 어쩐지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쓸쓸해질 때쯤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힘을 내보려 노력했다.


세 번째 낮잠은 2시간 가까이 잤다. 덕분에 컴퓨터를 켜 이유식 준비물도 검색하고 아기 사진들도 정리할 수 있었다. 앨범에 넣고 싶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고르며 웃음 짓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남편이 주로 차리지만, 오늘은 왠지 내가 하고 싶었다. 아닌가? 어쩐지 내가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이른 저녁을 먹으려는데 아기가 깼다. 바운서에 앉혀 장난감을 쥐어주고, 칭얼거리기 전에 얼른 밥을 먹었다. 천천히 먹는 게 오랜 습관이었던 나는 어느새 남편보다도 더 빨리 식사를 마치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이 아기를 봐주는 동안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아기 목욕 시간이다. 목욕 담당인 남편이 깨끗이 씻긴 아기를 안고 나오 함께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다.


목욕을 마친 아기의 수유는 내 담당이다. 아기도 어른처럼 저녁이 되면 피로가 몰려와 가장 힘들다고 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젖병을 밀어내는 아기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지만 오늘도 쉽지 않다. 어르고 달래 가며 트림에 양치까지 마친 뒤 소화를 위해 좀 더 안아줬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이제는 안고 있으면 제법 묵직하다.


안고 있던 아기가 하품을 할 때 침대에 눕혔다. 잠시 눈이 말똥해지는 것 같아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니 곧 잠이 가득한 눈이 됐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오니 저녁 8시. 장난감과 아기 매트를 소독하고 간단히 청소까지 마쳤다. 휴, 육퇴다.




우리 아기는 소위 말하는 '순딩이' 아기다. 이유 없이 우는 일이 잘 없고, 80일부터 통잠을 잤으며, 115일부터 분리수면을 무난하게 해오고 있다. 게다가 우리 남편은 또 어떤가. 나보다 훨씬 집안일에 적극적이고 육아 참여도 또한 매우 높다. 오늘도 두 달 만의 출근이라 피곤할 텐데도 아기 목욕, 젖병 세척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이 착한 아기와 성실한 남편을 데리고 '힘들다'라고 말하는 건 정말이지 배부른 소리인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과를 마친 오늘 밤, 눈물이 났다.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실 많이 허전했나 보다. 바쁘게 수업하고 업무를 처리하며 학생들, 선생님들과 부대끼는 평범한 일상을 나는 생각보다 더 좋아했나 보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먼저 휴직을 하겠다고 한 사람은 나였다. 육아가 전혀 내 적성이 아님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저 나의 아기가 가장 어리고 연약한 시기에 온전히 내 힘으로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 마음을 지키기가 첫날부터 힘든 나 자신이 부끄러워 또 눈물이 났다.




영화 <인턴>에서 벤 할아버지는 오랜 직장에서 은퇴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Don't get me wrong. I'm not an unhappy person. Quite the contrary. I just know there's a hole in my life, and I need to fill it. Soon.

(번역: 오해 마세요. 저는 불행한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저 제 인생에 어떤 구멍이 생겼고, 그걸 채울 필요가 있다는 걸 알 뿐이에요. 곧 말이죠.)


지금의 나는 분명 불행하지는 않다. 아기의 웃음을 보며 나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을 때가 많고, 하루하루 커가는 아기를 보면서 보람도 느낀다. 처음 해보는 육아가 두려워 움츠러들기도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생활에 대한 기대도 있다. 하지만 내 교직 인생에 1년이라는 구멍이 생긴 건 맞다. 나는 이 구멍을 아기와 함께 잘 채워나가고 싶다.


개학을 맞는 봄이 되었으니 나도 유모차를 밀고 으로 나가야겠다. 태어나자마자 겨울이 되어 바깥 구경이라고는 병원에 가는 게 다였던 아기와 처음으로 동네를 산책해야겠다. 그러면서 찬찬히 앞으로의 생활을 설계해야겠다. '엄마'로서의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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