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 대학생이 된 친구들도 있고, 재수하는 친구들은 이제 결과들이 마무리되어 3월부터 또다시 새 학기를 시작한다. 대학생이 되었다가 다시 원하는 대학, 과로 가겠다고 재수학원으로 향한 용기 있는 친구들도 있다.
내가 10대, 20대 때는 1년 재수하는 것이 그리 큰일 같아 보였는데 지나고 보니 1,2년 더 준비하는 것은 인생에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션에게도 혹시 하고 싶은 게 있거나 할 때 고민하지 말라고 말해 왔다.
처음은 조금 늦게 시작하는 것 같아 보여도 나중에 돌아보면 차이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그때 자기길 찾아 방향 잘 정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길이라고도 말했었다.
션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댁에 며칠 차이로 태어난 션의 사촌들과 함께 포대기에 쌓여서 세 아기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아직 뒤집기도 못하고 할 수 있는 건 꼼지락거리고 옹알 거리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아기들,
그리고 유치원 다닐 때 방긋 방긋해 맑게 웃던 귀여운 아기들, 초등학교 때 똘망거렸던 친구들, 중고등학교 때 솜털 보송한 친구들.
이 많은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몇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지금 각자 어딘가로 흩어져 스무 살을 자기 방식으로 지내고 있는 모습을 함께 연결시켜 보았다.
분명히 같은 공간에서 같은 환경과 같은 자극을 받았는데, 장면이 바뀔 때마다 친구들은 바뀌어 있고 몇 년 안되는 이 기간 동안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단지 어떤 대학을 갔다, 안 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틀'이 조금씩 만들어진 것이 보이고 성격과 가치관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어릴 때 '션과 참 비슷하구나' 싶었던 아이들도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새로 만난 친구인데 '와, 정말 션과 비슷하다' 이런 아이도 보인다.
2월 중순이 되니 어느 정도 아이들 대학 진학이 정리가 되었고 나서 문득 생각이 나서 션에게 해 준 말이다.
너 태어났을 때 너랑 사촌들 포대기 쌓여서 나란히 누워있을 때만 해도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꼼지락거리는 거 말고는 하나도 없었어. 학교 다니면서 만났던 친구들과도 다 비슷하게 배우고 놀고 했었고.
그런데 너 태어나서 10년, 20년이 지나면서 너랑 네 친구들 모두 길이 조금씩 달라졌잖아.
엄마 나이대도 그래. 분명히 같은 대학 다녔고, 같은 회사 다녔고, 같은 프로젝트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면 다 달라져 있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도 있지만, 엄마가 봐도 엄청나게 '성장'한 사람이 있어.
갑자기 그게 너무 신기한 거야.
백지상태에서 시작했고, 같이 배우기도 했는데 왜 지금 다 다른 데서 다른 길 가고 있을까, 아이들마다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때는 같은 곳에 있었고 비슷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 있고, 또 달라져 있을까.
그게 '나도 모르게 했던 선택' 때문이었던 것 같아.
너무 '작은 선택'이라서 선택인 줄도 몰랐던 선택이 조금씩 방향을 틀어주고 있었던 아닐까싶은 거야.
그 방향이 너무 미세해서 지금 당장은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는데, 원래 각도라는 게 그렇잖아. 시작은 차이가 없어도 멀리 가서 보면 엄청나게 벌어져 있는 거.
그렇게 매일 같이 했던 조그만 선택이 방향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틀어주어서 나도 알지 못했지만, 10년, 20년이 지나니 그 간극이 엄청 벌어져 있는 거지.
왜 선택이라고 생각조차 못 하냐면, 오늘 한 나의 '행동' 정도 수준이라서 그런 거 같거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일어나서 하는 일들이 뻔하잖아. 빨딱 일어나서 자기 루틴 하기 vs 피곤해서 조금이라도 더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기, 골고루 잘 먹기 vs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거나 간식 먹기, 책을 읽거나 동아리 활동하기 vs 귀찮아서 핸드폰만 쳐다보기 등등
지금 나에게 쉬는 시간 1시간이 주어졌는데 이 시간에 누군가는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인스타나 유튜브 들어가서 그냥 이것저것 재밋거리 찾아본다고 치자. 이건 '선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작은 그냥 습관적인 행동이거든. 이때 누군가가 인스타의 재미있는 동영상 보고 싶지만 참고 '에이, 오늘은 꼭 이 책 읽을래, 숙제부터 하자'라고 치자. 이런 사소한 행동이 나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준거 아닌가 싶어.
하얀 도화지로 태어나서 뒤집기 하고, 배밀이하고, 기어다니고, 걷고 까지는 다 비슷하잖아.
그러다가 철들고 나서 내가 했던 행동들, 그 행동이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작은 오늘의 선택'이었고 나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주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오늘 내가 빵이나 과자를 먹었어. 내일도, 모래도. 그런데 10년 내내 그렇게 먹었다고 치자. 10년 후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기 힘들 거잖아. 오늘 먹은 과자가 '선택'이라는 생각 아무도 안 할 거야. 그냥 간식하나 먹었을 뿐인데. 그런데 그게 10년간 쌓이고 나면 10년간 건강한 음식 먹은 사람과는 차이가 크게 벌어져 있겠지.
'선택'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작은 행동'은 내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거 거든.
오늘 과자 안 먹는 건 쉽잖아. 그런데 10년 후가 되어서 그제야 체중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려고 결심하는 건 정말 힘들거든.
그러니까 네가 오늘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그게 아마도 10년 후 너의 모습을 알려주는 걸 거야.
그냥 하는 행동들, 습관들도 이리 큰 차이를 주는데, 의도를 가지고 신중하게 고민하고 내린 '선택'은 방향을 얼마나 크게 바꾸겠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회'라는 거 있잖아. 기회가 오면 잡으라고 하고, 이때 선택이라는 걸 하게 되는데, 기회가 와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 이때 말하는 준비라는 게 그렇게 '미래를 향해 야멸차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바로 '평소의 행동'들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이면 그 '준비'가 되는 것 같아.
오늘 만약 할 게 많아서 힘들었다면, '아 나도 모르게 좋은 선택했나 보다' 하고 기분 좋게 셀프 칭찬해 줘.
안 해도 되는 걸 했을 수도 있고, 설렁설렁하지 않고 제대로 한다고 힘들었을 수도 있고, 진짜 할 일이 많은데 미루지 않아서 바빴을 수도 있잖아. 나도 모르게 '내가 좋은 선택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반대로 오늘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다면, 그것도 '좋은 선택'했다고 생각해. 좋은 우정 쌓았고, 사람들과 잘 지낸 법 배웠고, 몸도 마음도 휴식을 취했구나 하고.
역시나 션은 씩씩하게 "응"이라면서 자기 이야기해 준다.
오늘은 이런 게 해 볼 거야!라면서, 그래그래~ 엄마가 잘못했다. 뜨거운 가슴에 불을 지폈구나.
ps. 실제 대화는 저리 우아하지 않는데 글로 옮기다 보니 엄청 미화해서 적게 된다. 쩝.. 사람들 오해하게 말이지.
가끔 통화하다가 '어? 나 좀 멋있는 말 한거 같은데? 싶으면 통화 마치자마자 메모장에 키워드를 몇 개 적어둔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나이가 드니 잊는 속도가 더 빨라져서 '아까 뭐라고 했더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내 블로그가 내 뇌의 외장형 디스크가 된 듯.
ps. 끙야.. 글 적고 나니 찔리네.. 그동안 힘들어서 미뤄뒀던 달리기하러 나가야겠다. 오늘 '행동'인지 '선택'인지 하나 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