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꿈꾸는 놀이터에서

피아노와 작업실사이

by 해피가드너



"요즘 뭐 하세요?" 지인을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면, 흔히 주고받는 질문이다.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면, "뭐 하면서 노세요? 골프예요? 아니면 여행이세요?"라는 물음이 따라온다. '아니요, 혼자서 신나게 놀아요.'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그런 나는 요즘 작업실에서 소품을 만들며 논다. 기분이 안 좋거나 우울할 때, 손끝의 흐름대로 무언가를 꼬무락거리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평온해진다. 비록 차고를 개조한 소박한 공간이지만, 오래된 친구를 만나듯 반가운 곳이다. 가끔 수업도 하고, 주문받은 소품도 만들며 선물도 한다. 오로지 소품 만들기에 집중하며, 커피 향과 음악이 흐르는 공간. 이곳은 막연히 꿈꿔왔던 나만의 놀이터일지도 모르겠다.




은퇴 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시간을 보낸다. 종교에 전념하기도 하고, 손주를 돌보며 '육아 보조 아르바이트생'이 되기도 하며, 운동과 자기 계발에 진심을 다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각자의 관심사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도 모르게 오랫동안 쌓아오던 작은 순간들이 지금의 시간으로 이어진 듯하다. 무언가에 즐겁게 빠져들었던 경험, 그 본능이 은퇴 버튼을 누르자마자 폭발했달까.


내 놀이의 기원을 굳이 살펴보자면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의 원대한 목표 아래 시작했던 피아노. 희고 까만 88개의 건반 앞에서 오직 악보에만 집중하던 그 시간은 내 생애 최초의 '몰입 훈련장'이었다. 음표가 손끝의 미세한 압력으로 바뀌어 아름다운 소리로 탄생하는 마법 같은 순간들. 그 시간이 어린 내게 가르쳐준 건 단순했다. 손끝을 집중하면, 즐거움이 따라온다는 것. 비록 엄마의 꾸지람이 두려워 친구들과 고무줄놀이조차 마음껏 못했던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훈련한 몰입 경험은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힘들 때마다 나만의 놀이터를 만들어 주곤 했다.


결혼 후,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 딸, 며느리, 그리고 시간 강사로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때였다. 그 나이에는 누구나 그렇듯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느라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뭐든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최선을 다하지만, 종종 힘에 부칠 때가 있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뭘 좋아했더라?' 하는 질문이 불쑥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비밀스럽고 절박한 임무라도 수행하듯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2층 천 가게로 향했다. 주로 아이들이 잠든 새벽에 후다닥 가서 예쁜 천을 사 왔다. 재봉틀의 '따다닥'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커튼이나 쿠션을 만드는 것이 최고의 '에너지 충전 놀이'였다. 재봉틀 바늘이 천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긴장한 마음이 풀렸고, 완성된 쿠션을 소파에 올려놓을 때면 뿌듯했다. '집을 내 손으로 직접 꾸며야지'라는 기대와 손끝의 움직임은 그 시절의 숨통을 틔워줬다. 몰입했던 그 잠깐의 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한 합법적이고 유일한 놀이 시간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외롭거나 힘든 일을 겪을 때, 무언가를 창조하며 나름의 해방구를 찾았다. 낡은 집을 고치고, 아이들 가방을,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었다. 삶이 버거울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으로 도망쳤고, 잠시나마 그곳에서 다시 힘을 얻곤 했다. 손을 움직이면 기분이 풀린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꼈던 듯하다.


드디어 오랜 시간의 육아와 사업, 모든 것이 끝나고 은퇴했다. 오래전부터 해오던 손끝 작업이 기억이라도 한 걸까. 나는 정원의 꽃들로 자연스럽게 소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힐링과 즐거움을 느꼈다. 지인들에게 하나둘씩 선물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더 행복했다. 혼자 즐기던 일이 '함께 나누는 기쁨'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달까. 원데이 클래스를 열고, 온라인 숍을 통해 판매까지 이어졌다. 취미가 삶이 되더니 새로운 길까지 열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놀이터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아이 울음 사이로 재봉틀을 돌리던 순간도, 지금의 고요한 작업실도 모두 나를 숨 쉬게 한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몰입하고, 위로받고, 다시 일어서며 삶을 조금 더 반짝이게 했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꿈꾸는 놀이터에서 마음이 향하는 대로 머물며 나답게 빛날 것이다. 여러분만의 놀이터는 어디신가요?



요즈음 만드는 소품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름다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