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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킴 May 18. 2022

비건들 눈치 보던 점심 시간

채식세상에서 육식인으로 외로웠던 시절

영국에서 내가 다녔던 회사 ‘러쉬’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회사철학 전문 디렉터(Ethics Director)가 있을 정도로 동물과 인권, 환경 보호에 진심이다. 사내 이벤트가 있을 땐 채식 음식만 제공하고 사무실용품은 모두 친환경재를 쓴다. 그러니 채식하는 직원들이 많은 건 당연했다. 채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베지테리언’은 해산물과 고기를 먹지 않고, ‘비건’은 해산물, 고기뿐만 아니라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방식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환경과 동물을 위해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추세다. 


크리스마스 파티 때 먹은 러쉬 제품 모양의 비건 음식(좌), 종종 제공했던 본사 점심 이벤트로 제공한 비건 음식들(우)


반면에 나는 러쉬에 입사한 2017년까지만 해도 채식의 ‘ㅊ’도 모르는 상태였다. 매 끼니에 고기가 없으면 어색한 나라 한국에서 왔으니 당연했다. 더욱이 입사 전 2년 동안 런던에 있을 때도 채식하던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채식주의자가 다수인 회사에 오니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동료 중에는 이미 10년째 비건으로 지낸 이들도 꽤 있었다. 동료들과 얘기하면서 배추 덩어리 김치조차 비건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치에 양념으로 들어가는 멸치액젓을 그저 소스로만 봤지, 멸치가 생선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사에서 흔치 않은 외국인으로 나의 나라 한국을 소개할 기회가 많았지만, 평소 자랑스러워하던 한국 음식만은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없었다. 비건들에게 추천할 만한 음식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질 뿐이었다.


런던으로 사무실을 옮겼을 때 네 명의 동료와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네 명 중 한 명은 베지테리안, 세 명은 다 비건이었다. 넷 다 영국 백인에 채식을 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동양인에 고기를 먹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의식하게 되었다. 심지어 인스타그램에 비건인 한 동료가 육식을 먹지 말라는 콘텐츠를 올리는 걸 보고 내 어깨는 더 움츠러들고 말았다. 압박감에 못이겨 점심시간에는 혼자 옥상에 가서 도시락을 먹곤 했다. 런던 물가가 워낙 비싸니 집에서 직접 요리하고 도시락을 싸 오는 게 합리적이었다. 주로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김치볶음밥이나 떡볶이, 파스타 같은 음식을 싸 왔다. 그러니 소고기나 베이컨 따위를 동료들 옆에서 어떻게 먹겠는가! 나를 ‘지구를 생각하지 않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만 같아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6개월 정도 지났을까. 네 명의 동료 중 한 명이었던 릴리가 회사를 떠난다고 하였다. 근처 펍에서 고별 회식을 했다. 영국은 회식이라 해도 펍으로 가면 보통 술만 마신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술 마실 때 안주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토박이 한국인으로서, 더 이상 빈 속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비건 동료들이 신경 쓰였지만, 술을 더 잘 흡수하기 위해 안주를 먹기로 결심했다. 그건 바로 과감하게 핫 윙(hot wing)!

그렇다.. 치킨... 거의 처음으로 솔직당당하게 고기를 먹기로 한 것이다.


 핫 윙이 테이블에 놓이자, 괜히 민망해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너네 비건인데 내가 닭 먹고 있어서 미안해. 근데 내가 빈속에 술을 마시면 토해서 음식을 먹어야 하거든. 메뉴에 고를 게 별로 없어서 핫 윙을 시켰어.”


동료들이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술을 마셔서 알딸딸해진 걸까, 떠나니까 속이 시원해진 걸까. 릴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나도 어제 저녁에 치킨 먹었어."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고? 너 비건이잖아. 그런데 저녁에 치킨을 먹었다고?”


알고 보니 릴리는 그동안 비건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러쉬에서 무려 6년 동안 일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 친구는 저렴하면서 비건인 건 컵라면 뿐이라며 점심으로 99p짜리 저질 라면을 후루룩 먹곤 했다. 사실은 저녁에 고기를 먹어서 남은 음식을 도시락으로 싸 오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충격적인 반전에 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쾅쾅 치면서 깔깔 웃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맨날 옥상 가서 점심 먹었잖아!”


비건 세계에서 남들 눈치를 본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동안 꽉 쥐고 있던 긴장감이 스르륵 풀렸다. 


영국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육식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하지만 러쉬에서 일하면서 식생활에서 육식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5년동안 비건 외에도 내가 몰랐던 식생활을 가진 동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해산물까지는 먹는 동료, 밀가루 음식을 못 먹는 동료, 병 때문에 오히려 채소를 못 먹는 동료까지 있었다. 서서히 비건들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세상엔 음식을 먹는 방법이 이토록 많은데 단 하나의 기준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어느 마트에 가도 비건, 글루텐프리 등 다양한 식습관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식품 코너가 있다. 레스토랑에는 비건과 베지테리안 메뉴도 많다. 이제 단일한 식생활의 시대는 지나가고 다양한 식생활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하다. 집에 초대한 손님 중에 비건이 있거나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요리할 메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성가시다고 그들의 선택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념으로 음식을 가리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특정음식을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사연이 있는 거니까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어느 날 비건인 동료 에밀리아는 내게 말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고기를 먹으면 안 좋게 보고, 그런 사람들에게 채식하라고 설득하고 싶었어. 그런데 이제는 신경 안 써. 나 신경 쓰지 말고 고기 편하게 먹어.”


에밀리아는 내 생일 선물로 아름다운 요리책을 선물했는데 그건 육류요리가 포함된 요리책이었다. 그녀가 날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고마웠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까다로운 사람’, 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 선택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하고 눈치 보는 습관도 훌훌 털어버리는 게 좋다. 각자의 선택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면 서로 무해하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런던에 살 예정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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