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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성공했을 뿐인 이야기

by 릴랴

내가 무슨 글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얼굴에 꼼꼼히 선크림을 바르고 집을 나섰다. 맛있는 햄버거를 사 먹고 도서관에 앉았다. 그동안 보지 않았던 강의를 듣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완벽하지 않았고 생각했던 거에 비해 반 정도만 해냈다. 내일 더 잘하겠다 보다는 오늘만큼만 해내길 바라기도 한다. 더 바랬다간 다 놔버릴 거 같으니까. 집을 나서고 글을 쓰고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뭔가를 한다는 게 별 특별할 거 없이 사소한 일이겠지만 지금 나한테는 매우 지치고 특별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표정을 제대로 짓고 있는지조차도 신경 쓰여했던 날들이 많았다. 지금은 조금 덜 신경 쓰인다. 그 부분이 확연히 느껴진다. 조금 이상해 보여도 덜 당황하고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거나 정상적이게 보이지 않을 거 같은 걸 강박적으로 가리기보다 적당히 드러내놓고 살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확 튀어나올 때도 자책도 안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나도 그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너무 잘 알게 돼서. 자책한다고 나아지는 모습도 아니어서. 그냥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는 걸 은연중에 어느 지점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했었나 보다. 실망스럽지도 않은 거 보니까. 필요 이상으로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던가 애써서 뭔가를 해주지도 않게 됐다. 내가 힘들면 달라붙어도 매정할 정도로 쳐냈고 그래서인가 전에는 넌 너밖에 모른다는 소리를 들으면 서럽고 억울하고 눈물 밖에 안 났는데. 요즘은 눈물은커녕 맞지. 자기는? 너도 너밖에 모르면서 자기한테 할 소리를 나한테 하고 있네. 하고 차디찬 웃음이 지어진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건지 필요 없는 부분이 갈수록 도려내지는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예전만큼 괴롭지는 않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가차없어지고 냉정하리만치 단호해지면서 정말로 남 탓도 안 하게 됐고 내 탓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사정이 있었다. 나한테도 사정이 있다. 안 좋은 일들은 대체로 기분이 나쁘고 내게 일어났다는 그 자체로 몹시도 애석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시 못 일어날 일도 아니었다. 기운차고 희망차게 주인공처럼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한참 괴로워하면서 한껏 우울해하면서 뭉그적거리면서 일어나도 된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볼품없는 얼굴로 하늘을 바라봐도 된다. 예를 들자면 태양이나 밤하늘이나 달이나 별도 괜찮고 비가 오는 걸 봐도 좋다. 반듯이 보이는 광경이 환하지 않더라도 비가 온다면 씻겨 내려갈 테고 흐려서 희뿌옇다면 좀 더 같이 우울해해도 괜찮겠지. 또 운이 좋다면 오로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단지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보이는 광경이었다. 뭔가를 하면 뭐라도 주어진다. 단지 우리가 바라는 형태가 아니었거나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방향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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