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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Oct 10. 2023

자매가 필요해

무남독녀로 살다 보니

은아 : 선생님, 제 여동생 때문에 못 살겠어요.
 나 : 왜 그러는데.

은아 : 문제를 잘못 풀고 있어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절 더러 꺼지래요.
 나 : 지금은 그렇게 싸워도 나중에 어른 되면 정말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거야. 진짜!
 

언니가 있으면 좋겠네!
 여학생들은 보통 언니나 여동생과 열심히 싸운다. 오빠나 남동생과는 무관심하게 지내지만 같은 동성 형제와는 다툼이 많다.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옷이나 가방 같은 물건을 허락 없이 쓴다고 화를 내고, 누가 오래 안 자고 버티면서 공부하는지 경쟁을 하느라 밤에 잠도 안 잔다. 언니가 동생보다 키가 작으면 작다고 동생이 대놓고 무시하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한두 살밖에 나지 않으면 같이 사춘기의 바다에 빠져 서로 예민하게 행동하고 곱지 않은 언어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이렇게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자매들은 어른이 되면 가까이 지낸다. 아니 지내는 것 같다. 나는 사실 형제자매가 없어서 자매지정을 잘 모른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모네랑 이종사촌끼리 여행을 가고 왕래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어머니도 세 자매의 막내여서 나는 어려서부터 이모 댁에 자주 놀러 갔었다. 지금도 가장 친한 사촌 언니는 이종사촌 언니이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엄마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으신 큰이모 작은이모 댁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아주 많으신 이모부 옆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멀리 앉아 있기만 했던 나에게 어느 여름날 작은 이모부가 대청마루에 누어 팔을 펴시고는 그 팔에 누워 보라는 것이었다. 용기를 내서 무서운 작은 이모부 팔을 베고 누워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 작은 이모부 옆에 앉아도 괜찮았다. 그 이모부 댁에는 ‘마루’라는 이름의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강아지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어슬렁거리던 마당에서 이모가 고등어랑 꽁치를 구워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그 저녁나절 공기 냄새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기억의 단편에 이모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어머니는 두 언니들과 각별한 사이였던 게 분명하다. 이모부들과 아버지도 같이 모여 고스톱도 치고 나는 그 옆에서 앉아 고스톱의 원리를 깨치고 있었다. 어른들이 놀이를 하면서 큰소리로 즐거움의 감탄사 연발하거나 아쉬움의 끙끙 소리를 내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어른이 돼서 고스톱을 치고 싶어졌다.      


엄마가 이모들과 느끼는 그 감정이 무엇일까 궁금할 때가 많다. 자녀를 갖지 않은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이 어떤 것일까 궁금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세대에서 무남독녀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건강이 늘 안 좋으셔서 나 하나를 낳은 것도 다행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형제자매에 대한 궁금증을 뒤로하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했더니 나에게 세 자매 시누이가 생겼다. 세 자매는 나의 어머니와 두 이모처럼 사이가 좋았다. 한번은 프랑스 파리로 첫째 셋째 시누이 두 분이 여행을 가는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셨다. 프랑스 말을 할 줄 아는 나를 가이드로 쓰실 요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같이 갈 수 없다고 하는 중에 나는 몹시 두 분이 부러웠다. 언니랑 여동생 둘이서의 프랑스 모네를 찾아 떠나는 여행.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 수련으로 유명한 지베르니 모네의 집을 가보라고 추천해 주면서 나도 언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언니가 되면 좋겠네!

추석 명절 지내고 가족묘 이장을 했다. 시조부모님과 시부모님의 묘가 너무 먼 선산에 있어서 집에서 가까운 봉안당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장 절차를 진행하면서 남편의 5남매가 함께 모여 하룻밤을 시작은 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넓은 방에 이부자리 5개를 깔고 찜질방처럼 방바닥을 달구고 우리 시어머니의 딸 셋과 며느리 둘이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깊은 밤이 되었고 불면증이 있는 내가 신기하게도 이 말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일 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헐렁한 관계 같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늘 함께하는 이 견고하게 평생 이어지는 이 자매의 관계를 또 한 번 옆에서 느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유작 원고를 모은 책 <잘 산다는 것>에 보면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고 했다. 상처, 절망, 혼란을 느끼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이 가장 온전한 인간다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런 타인을 돌보는 행동은 가족 내에서 배우고 이루어지는 것이니, 형제 자매간의 돌봄과 사랑이 인간성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아닐까 한다. 형제자매의 사랑을 느끼고 싶은 나의 욕망은 아마도 그런 돌봄과 사랑을 나눌만한 공동체를 찾는 내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언니에게 받고 싶은 돌봄과 동생에게 주고 싶은 돌봄을 나는 계속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모른다. 내가 밥을 사면 딸에게 용돈을 주시는 세 명의 형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받은 돌봄을 나눠 주려면, 피터슨 목사님은 지성, 기술,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분 내킨다고 가끔 하는 일이 아니므로. 그런데 시누이님들이 나와 나의 남편에게 주는 것 같은  돌봄을 나눌  대상을 찾았다는 생각에 나는 요즘 기쁘다.


 신앙 공동체에서 지난봄 나는 나보다 열두 살 어린 자매를 만났다. 띠가 같아서 왠지 반가웠다. 관심사가 비슷해서 친밀감을 쉽게 느낄 수 있었던 우리는 서로 작은 선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책, 허브차, 초콜릿, 스파게티 소스나 간장 같은 식재료까지 챙겨주고 싶어졌고, 그 자매는 내가 생각나서 샀다는 물건을 안겨주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게 여동생에게 느끼는 언니의 감정이 아닐까? 어제는 가을 하늘 높은 날이어서 우리 부부와 자매 부부가 서로 만나 둘레길을 걷고 중국집에 가서 누룽지탕과 짬뽕을 시켜 나눠 먹었다. 자매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놓고 번민하고 있다고 했을 때 나와 남편은 어린 시절 운동회 때 마지막 계주 선수를 응원하듯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가 아닌 내면의 요청을 들으라고.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언니가 되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이 시점에 나는 자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내가 지성과 지혜와 신체적 힘을 가졌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충분치는 않지만 열두 해를 더 산 언니니까 경험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돌보거나 돕고 싶다면, 나도 그 도움의 근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게 사는 원동력, 삶의 이유와 동기인 게 확실하다. 병약한 어머니도 나를 돌보시느라 긴 병고의 세월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이기주 작가는 산타할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거라고 했다. 나도 언니를 바라지 않고 언니가 되는 것으로 어른이 되는 모양이다. 언니가 되면 동생이 있는 거고 동생이랑 손을 잡으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포레스텔라의 멋진 버전으로 들었던 ‘홀로 아리랑’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자매는 손잡으라고 있는 것이리라.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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