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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쥴리 Oct 19. 2023

이별 후 알게 된 것들

남들처럼 직장 생활하다가, 1~2년이 지나면 남자 친구와 결혼해서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며, 너무나 사랑하게 될 아이를 위해 육아에 전념하게 될 현실이 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26살의 평범한 로망이었다.

영어 스터디 모임에서 알고 지내다가 연인으로 발전했던 사이. 나보다 2살 많았던 남자친구는 평소에도 “우리 나중에 결혼하면~”라는 말을 많이 했고, 오히려 “언제쯤엔 우리가 결혼 가능할 것 같다”라는 식으로 먼저 자주 내뱉곤 했다. 그는 “사계절을 같이 겪고 나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자”라고 했고, 사계절이 지나 1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사실 부모님은 그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진 않으셨지만, 딸내미가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에 집으로 한번 데려오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나의 대학교 졸업식 때, 그도 참석하여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고 말씀하신 건 처음이었다. 부모님의 말씀을 그에게도 전했다. 하지만 사귀면서 결혼 얘기를 입에 달고 지내던 그는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가 오가려 하자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애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그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임을 느꼈다.

그는 쭈뼛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결혼에 대해서 아직 생각이 없어...”

대학원생이었던 그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몇 년 뒤에는 생각이 있어?”

“...”     

쉽게 대답하지 못하던 그 사람은 말을 덧붙였다.

“2~3년 뒤까지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없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결혼 생각이 아직 없다”보다 “년 뒤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모르겠다”라는 말. 그런 말을 나를 앞에 두고 말하는 그를 보며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 나랑 오래갈 생각도 없으면서 “결혼”에 관해서 그렇게 뻔뻔하게 이야기해 올 수 있던 건지.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한 걸까. 아니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걸까. 나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함께한 지난 시간들에 대해 의구심이 들던 중 ‘그 사람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결혼하려고 했지?’라는 물음에 도달했다.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크게 부딪칠 일 없이 그럭저럭 무난하게 서로 잘 지내던 사이였고, 결혼을 생각할 나이 즈음에 그가 내 옆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사람과의 결혼을 자연스럽게 꿈꿨을 뿐이었다. 환상이 깨지면서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와의 결혼'보다 단지 '그 시기에 결혼'을 하고 싶었다는 걸. 사계절을 운운하던 그 사람과는 결국 1년 만에 이별했다.






"언제부터 내 1순위가 바뀌었지?"


그와 연애하면서 내가 많이 변해있었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보통 연애하면 항상 1순위는 '나'였는데, 이 사람과 연애할 동안 나도 모르는 새 2순위로 밀려나 있었다. “나 이거 할 거야~”를 말하기보다는 “내가 이거 하면 어떨 것 같아?”라고 그에게 의견을 자주 물어봤었다. 그의 반응에 따라 나는 좌지우지했고 항상 그가 우선이 되어 있었다. 내 미래에 그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건 당연했.

이별하던 날, 가장 친했던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하필 몸이 안 좋아서 감기약을 먹느라 나는 술은 못 마셨지만) 노래방에 갔다. 한 친구는 새벽에 분명히 그 사람이 다시 연락올 것이라 했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내 말을 뒤로하고 그 친구의 말대로 어김없이 문자가 왔다. 쓸데없는 말을 장황하게도 보낸 장문의 문자에서 기억나는 건 이 문장뿐이었다.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무슨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이 말을 내가 직접 듣게 될 줄이야. 친구들과 함께 실컷 욕하고 집에 돌아왔다. 친구들과 있을 땐 잠깐이나마 이별의 아픔을 잊을 순 있었지만, 결국 온전히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슬픔이었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전날 노래방에서 친구와 같이 불렀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크게 틀어놓고, 운동을 하려고 방 한구석에 요가매트를 깔았다. 하지만 내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심장이 아릴 수가 있을까. 그 아린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기까지 해 버렸다. 내 감정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견디기 힘든 나날들이 이어졌다. 초라해진 나와는 달리, 헤어진 직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놀러 다니며 행복해하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니 화가 났다. 이런 감정 소비는 나만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살이 깊게 베인듯한 고통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번호를 지우고, 핸드폰에 그동안 함께 찍은 몇 백여 장이 되는 사진들을 없앴다. 함께 추억을 쌓아온 시간은 1년, 삭제하는데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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