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전 막학기. 영문학을 전공한 평범한 취업준비생이 생각해 낸 대안은 경상 계열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어문계열 전공자들은 경영학을 복수전공해서 마케팅 쪽으로 많이들 빠진다고 선배들에게 건너 건너 전해 들었다. 마케팅이 뭔지도 몰랐지만 나도 그들과 함께 갑자기 복수전공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그해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준비해 지원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예리한 경영학과 교수님들은 누가 봐도 취업하려고 갑자기 지원한 듯한 학생을 단박에 알아차리셨음이 분명했다. 경영학 복수전공은 타 복수전공에 비해 특히 경쟁률이 높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반학기를 더 다니며 경영학을 배우고 싶은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했다. 취업이라도 하려면 경영학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지길 바라면서.
취업이라는 명분 때문이었지만, 관심이 생겨 수강했던 조직행동론이나 마케팅원론 수업은 꽤 재밌었다.경영학과 교수님들을 직접 찾아뵈며 보완할 점을 메꾸기 위해 노력했다.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던 영문과 선배를 뒤 따라다니면서 조언을 받아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실용회화 외국인 교수님을 찾아가 영어 면접 준비도 도움 받았다. 그 무렵 경영학 관련 대외활동을 지원하려고 몇 번이나 찾아봤다.
하지만 다양한 마케팅 대외활동 경험을 요구하는 지원 자격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은 나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경험을 해보고 싶은데 이미 경험을 잔뜩 쌓은 사람들만 뽑았다. 대외활동마저 경력 있는 신입을 뽑고 있었다.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나름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경쟁률이 유난히 높았던 두 번째 복수전공 면접에서 또 떨어졌고 혼자 되뇌었다.
지금 다른 길을 시작하기엔 늦었구나
당시 24살.
지금 돌아보면 너무나 어리고 해 볼 수 있는 게 많은데. '앞으로 뭐 먹고살지'에 대해 왜 이리 안달 나서 내 한계를 곧바로 정해버렸을까?
졸업하자마자 내 미래를 결정하지 못하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줄 알았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나를 돌아볼 순 없었는지 돌이켜보았지만,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취업 준비에 급급했을 것이 분명했다.
주위 동기들은 모두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남들 하는 만큼이라도 해야 내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나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항상 남이 되어 있었다.
4.05/4.5 학점으로 졸업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성실하게 임했던 대학 생활 4년의 결과물은 그뿐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전공 & 4년 동안 경험한 것들' 내에서만 진로를 정해야 하는 걸 최선이라 여겼다. 한 줄기의 희망이라 붙잡은 경영학 복수 전공도 실패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던 그저 그런 평범한 문과생은 애매한 취준생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취업 채널 영상을 보는데 적성에 맞는 직무 찾는 법을 알려준다는 취업코치가 등장했다. 혼자서 취업을 하기엔 어렵다고 느낀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 취업 코치에게 상담을 받고 싶었다. 검색해 보니 강남의 한 취업 컨설팅 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학원에 등록하러 갔더니,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취준생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1:1 컨설팅을 하던 날 취업코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랬다.
'영문과 나와서 최선은 영업직'
'나에게 맞는 적성을 찾아주지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는 그 말에 뭉개져 버렸다. 영업직이라고? 내게 안 맞을 거란 사실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눈에 보이듯 뻔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고, 특출 날 게 없는 나를 뼈 때려준 그 학원이라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졸업 전에 취업해야 했고, 남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알만한 기업에 들어가는 게 우선이었으니 '취업의 신'의 말을 따를 수밖에.
그러려면 내 성격과 취향은 뒷전으로 하고 회사가 원하는 사람으로 포장해야 했다. 취업 시장에서는 '나'가 아닌 '회사'만 있었고 항상 나를 뽑아주길 바라야만 했다. 철저한 을의 입장에서 오로지 그들에게 간택당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매번 자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럴듯해 보이는 경험치를 얻은 것마냥 꾸역꾸역 포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이 내 안에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