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고등학교를 나왔다. 여고에서만 일어나는 흔한 사실 중 하나를 귀띔하자면,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엔 최애 남자 선생님 한 분씩 자리 잡곤 한다는 것.
나의 아이돌은 옆 반 영어 선생님이셨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비보잉춤을 잘 추셨다. 웃을 때 눈이 반달 되는 선생님을 마주할 때면,여고생이었던 내 마음엔 봄바람이 불곤 했다.아침 보충 수업 때 영어 선생님의 수업을 찾아 듣고, 야간자율학습 시간 때는 선생님이 오시나 안 오시나 살피면서 괜히 설레고.. 그 시절, 반 친구들이 "영어 선생님을 향한 나의 짝사랑"을 거의 모두 다 알 정도로 꽤 진심이었다.
그래서 영어를 더 잘하고 싶었고, 잘해서 선생님의 눈에 띄고 싶었다. 그렇게 영어를 좋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대학교 전공이었지만, 그 전공이 취업할 때가 되어 내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문송합니다(취업이 어려운 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니까.
인문계 출신의 영문과는 무엇을 의미했느냐. '교환학생 경험은 기본이고, 토익 900은 쉽게 넘는 종들'이라고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 그 어느 하나 나에겐 쉽게 얻어진 건 없었지만, 그건 내 사정일 뿐이었다.
명문대가 아니더라도 "영문과 출신"이라는 타이틀 자체는 "영어 잘하겠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주전공인만큼 영어라도 완벽하게 해서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강박증이 생기고 있었던 걸까? 특별히 잘하거나 관심사는 없었지만, 그나마 영어 선생님 덕분에 조금 흥미를 가지게 된 영어가 어느 순간부터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지만.. 어째. 난 이미 영문과인 걸.
대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나는 자연스럽게 미국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교육학에 관심이 많아 교육 커리큘럼에 특화된 대학교를 찾아 지원했고, '간신히' 토플 기준 점수를 넘겨 그토록 원했던 켄트 주립 대학교에 약 1년간 공부하러 떠났다.
꿈같았던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4학년 막학기였고, 본격적으로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원래 교육에 쭉 관심 있었기에 졸업 후 교육대학원 진학을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취업할 때 여자 나이가 중요했고 나이가 더 들면 신입으로 입사하기엔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나이 부담이 없는 대학원은 일단 미루고, 회사부터 다니기로 했던 것.
어떻게 보면 가장 하고 싶었던 건 교육 쪽으로 깊게 파고드는 것이었지만,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한다고 하니 일단 현실에 맞추기로 했던 것이다. 취업에 대해 막연한 걱정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성실한 대학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크게 불안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졸업 시기가 되어 지난 4년을 되돌아보니, 정작 기업에 입사할 준비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교직이수 준비, 교육 봉사활동, 취업&면접 특강 수강, 비즈니스 마케팅 교육 과정 이수, 호텔 인턴 면접, 항공사 준비..... 등 이것저것 시도도 많이 했다.
단지 내가 해온 활동들은 이력서에 특별히 내놓을 게 없었다. 특히나 교환학생 생활에서 부딪치고 얻은 소중한 경험들은 단지 "교환학생 경험"이라는 한 줄로 이력서에 들어갈 뿐이었다. '전공 공부를 하며 유일하게 사회보장카드(SSC)를 발급받아 교내 수업 조교를 병행하게 된 과정, 미국을 떠나는 날 친구들에게 100여 장의 편지를 받았던 내용,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계를 유지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방법....'등 매 순간 내가 진심이었던 과정은 없고 결과 한 줄로만 남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키워드는 뭐였을까? 진정성, 소통, 꾸준함...? 확실한 건 기업에서 원하는 키워드는 아니었다. 기업에서는 자기소개서의 모든 항목들의 수치화를 원했다. '몇 %의 이익을 냈는지, 얼마나 많은 고객을 모았는지, 무슨 기여를 얼마만큼 했는지..'등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나의 것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됨을 느꼈다.
졸업을 앞둔 나는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취업을 위해서는 이력서에 스펙 한 줄이라도 더 늘려야 했고, 결국 스펙을 쌓고자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뭐 하나 특별한 게 없던 나도 남들과 같아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