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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쥴리 Oct 18. 2023

우리 대리님처럼 될 거야!

어느 주말 오후였다. 원래라면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날이었지만 그와 싸운 직후였다.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한 덕분에(?) 갑자기 계획에 없던 여유 생겼. 이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가. 


당시 취업을 준비하면서 대학교 행정실의 기간제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외국인 기숙사를 총괄하는 일이 재밌어 보였고, 단지 외국인 학생들과 자주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어딘가 변태스러운 팀장과 감정기복이 심한 과장.. 그 둘의 환장하는 콜라보로 인해 일 시작한 지 개월이 채 되지 않아 그 지옥에서의 탈출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게 그곳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던 내게 여유가 생겼다는 건? 탈출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 자연스레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구직 사이트의 스크롤을 연신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영어 교재를 집필하는 교육 콘텐츠 기업이었다. 놀랍게도 고3 때 인터넷 강의에서 수도 없이 영어 선생님이 출판사 대표님이셨다. 내적 친밀감이 들면서 반가웠지만, 사실 취업 채널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업들만 알고 있어서 출판사는 각지도 못해 봤다. 하지만 취업을 준비하면서 진심으로 '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이제야 자소설이 아닌 제대로 된 자소서를 쓸 수 있을까? 모집 요강 세부 내용을 눌러봤다.


토익 900 이상, 영어 교육 관련 경험 우대


얼마 전 취득한 토익과 OPIc, 교환학생 경험, 교육 봉사활동, 미국에서 수강한 전공과 교육학 과목들. 게다가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학생들을 가르치며 썼던 독해&문법 교재마저 이 출판사의 책이었다. 이런 우연이! 마치 이 회사를 위해 준비된 느낌마저 들었다. 스토리를 긁어모아 나를 제대로 어필할 수 있겠다는 묘한 자신감마저 생겼고, 드디어 내게 맞는 회사를 찾았다는 생각에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영혼 없이 회사명만 바꿔가며  지난날의 자소설과는 다르게 진심을 담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기업의 성장에 몇 퍼센트를 기여했는지, 어느 만큼의 매출을 올렸는지..' 등의 입증이 어려운 내용이 아닌 '어떻게 영어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왜 아이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고 싶은지..'등 내가 느끼고 겪은 내용만 진솔하게 담았다. 며칠이 지나 1차 서류 합격 소식을 받았고 2차 영어 시험 일정이 잡혔다.


회사에 시험 보러 간 날, 어쩌면 직장 선배들이 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교재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다. 오피스룩, 목에 건 사원증, 한 손에 든 커피.. 평소 이런 것들에 로망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왠 걸. 갑자기 로망이 생겼다. 그러다가 머릿속에 든 생각.


'여기에서 꼭 일해보고 싶다'




직원분이 안내해 준 장소에는 시험을 앞둔 지원자들이 모여있었다. '이 중에서 내가 떨어질 수도 있는 거네.. 몇 명이 붙을까..'등 자꾸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내려고 손에 쥐고온 영어 필기노트를 내려다봤다. 시험 범위가 정해진 것도 없고 어떤 유형이 나올지도 몰랐지만, 중요하게 느껴지는 영문법을 하나라도 눈에 담기 위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꽤 길게 느껴졌던 시험 시간 동안 작문, 독해, 문법, 어휘의 과목을 풀었다. 며칠 뒤 영어 시험을 통과했다는 문자와 함께 최종 면접일이 잡혔다. 면접 예상 질문을 미리 준비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대망의 날, 비장의 무기인 '아르바이트할 때 사용한 A3 사이즈의 출판사 교재'도 잊지 않고 챙겨가서 나의 진심을 열렬히 보여준 결과, 운 좋게도 최종 합격을 했다.


25살, 그렇게 한 출판사의 신입 교재 연구원으로 첫 정규직 일을 시작했다. 입사 후 약 7~8개월 뒤, 우리 팀이 집필 수능 영어 독해 교재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얼마나 보람찼는지! 빳빳한 새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보니 지난 몇 개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함께 문제를 만들고, 교재 디자인을 정하고, 눈알 빠지게 교정하고, 인쇄소를 오가며 야근했던 나날의 힘든 순간들이 눈 녹듯 사라짐을 느낀 날. 뿌듯했던 그 기분은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대리님이 챙겨주신 신간 몇 권을 조심스럽게 집에 안고 가는 길, 내게 목표가 생겼다. 멋지게 성장하여 우리 대리님처럼 내가 이끈 팀이 교재를 출판해 내는 것.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전공을 잘 살려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직장인의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회사 내에서 발전하려는 모습을 스스로가 열정적이라 여기며 나름 기특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전에는 내가 가진 것들로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은 나를 알아봐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이 모든 게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깝지가 않았다. 나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을 드디어 찾았고, 입사함으로써 얻게 된 직함은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몰랐던, 그리고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회사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인 줄로 여겼을 만큼, '회사와 분리된 나'를 설명할 무언가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던 25살의 나는 그렇게 20대 후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관성이라는 명목 하에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집필에 참여한 첫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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