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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Jul 07. 2024

반려의자

mayol@골계전 18. 다 풀어주는 의자와의 인연

  “당신은 내가 좋아, 샤를리즈 테론이 좋아? 잘 대답해!”


  잘 대답하라니?

  평생을 정해진 답을 맞히기 위해 책상에 앉아 씨름했는데, 책상을 벗어나서도 정해진 답을 강요받는 내 삶을 돌아보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면에서 좌고우면 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헤쳐나가는 형이 있어 한 켠 마음이 든든하다.

 


  

  게으른 조상에게서 게으른 아버지가 나오고 그 게으름을 온몸으로 이어받은 K형은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가를 가지 못했다.  

  단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골프장에는 두 가지의 골퍼가 존재한다.

  ‘친 대로 공이 날아가는’ 골퍼가 있고 ‘본 대로 공이 날아가는’ 골퍼의 두 유형이다.

  K형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친 대로 공을 쫓아가는 천진난만한 성격이 미혼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K형에게도 솔로탈출의 볕이 들었는데, 여태 겪어보지 못했던 연애라는 걸 해보게 된 것이었다.

  다소 마른 체구의 K형은 오른쪽 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하나 둘 들어 올려 나무 한그루 없는 광활한 민둥산에 미역줄기 널듯이 왼쪽 귀까지 팽팽히 당겨 스프레이를 뿌렸다.

  마치 현악기의 줄을 당겨 튜닝을 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긴장감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전달되었고 조금만 더 당기면 뿌리째 뽑히던지 ‘팅’하고 다시 오른쪽 귀로 넘어갈 상황이었다.

  게으른 대신 꼼꼼했던 K형은 아슬아슬한 작업을 몇 시간에 거쳐 진행했고 누가 봐도 대머리가 아닌 속 알 머리 없는 정도의 변신을 마치고 나서야 양복을 입을 수 있었다.

  미국 중서부에 자주 불어대는 강한 토네이도 정도는 돼야 머플러 날리듯이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날려 보낼 수 있을까. 웬만한 바람으로는 K형의 단단히 고정된 머리를 뜯어낼 수는 없었다.

  K형이 이런 꼼꼼한 작업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대구광역시에 사는 한 미혼 여성을 소개받아 한 번은 서울에서 한 번은 대구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두 번의 데이트 끝에 여자로부터 ‘다시 한번 대구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K형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강한 바람을 피해 가며 대구로 달려 내려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성공원 주변에 5성급 모텔을 하나 잡고 여장을 푼 K형은 거칠게 대패질한 나뭇결처럼 살짝살짝 일어난 머리카락을 스프레이로 고정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 가는지…

  저녁 약속시간 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 K형의 눈에 모텔 한 구석에 의젓하게 두 팔을 벌리고 있던 안마의자가 눈에 띄었다.

  안마의자가 K형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드루와, 드루와~~’

  ‘그래, 굳은 근육이라도 좀 풀고 나가자.’


  처음 보는 안마의자의 브랜드는 ‘다 풀려’였다.

  온몸의 경직된 근육들을 모두 풀어내고 마음의 여유만 가진다면 여자를 이곳 모텔까지 유인할 수 있을 테고 그 이후에는 꿈에 그리던 결혼까지 자신의 열정을 이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형은 안마의자에 다리와 팔을 끼우고 앉아 처음 보는 복잡한 그림들이 그려있는 유선 키보드의 여러 버튼들과 전원 버튼을 번갈아 눌렀다.


  ‘우웅~~’


  엉덩이와 똥꼬를 간지럽히던 돌기들은 K형의 강력한 척추를 타고 등까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아… 이건 뭐야… 다~ 풀린다 풀려…’


  돌기들이 엉덩이와 등까지 몇 번의 왕복을 거친 후에는 발을 거세게 잡아 안았다. 그리고는 왼쪽 팔을 눌렀고 왼쪽 팔을 푸는가 싶으면 오른팔을 누르고 오른팔을 푸는가 싶으면 목까지 차오르던 돌기들이 귀밑까지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밑까지 오르락내리락하던 돌기들이 갑자기 뒷덜미를 잡고 뒤통수까지 치고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왼쪽 귀에 간신히 고정해 놓은 연약한 머리카락들이 하나 둘 닻줄 풀리듯이 튕겨나가는 게 아닌가.


  ‘아윽!!’


  K형은 모텔방 맞은편에 무심하게 서있던 커다란 거울을 통해 정성 들여 당겨놓은 머리카락들이 튕겨져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과 발이 꽉 눌려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때 거울 옆 화장대에 올려놓은 전화기가 울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에 맞춰 그녀의 전화가 걸려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안마의자는 K형의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 안은채 꿋꿋이 제 할 일을 계속해 나갔다.

  칼처럼 다려 입은 양복은 안마의자의 손길에 천천히 구겨져 빈티지한 모습으로 바뀌어갔고 이미 머리카락은 오른쪽 귀 한쪽으로 다 쏠려 버드나무 가지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진동에 맞춰 흔들거렸다.

  전화를 받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손과 발을 번갈아 잡고 주무르는 안마의자의 압력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간 안마의자와 싸우던 K형은 눈을 감고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안마의자의 노련한 손놀림에 익숙해지자 이 세상에 더 없는 평안과 축복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렸다가 꺼졌다가를 몇 번 반복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화벨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아득한 꿈결같이 둔탁한 소리가 되어 더 이상 K형을 긴장시키지 않았다.

  며칠 후 K형과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침까지 푹 자고 서울로 올라왔지.”


  서울로 돌아와 여자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고 했다.


  “자, 이게 그녀에게서 온 문자야.”


  [이런 문디자슥, 니 다시한번 전화 걸면 죽이삔다!]


  “형도 참 대단하다. 그런 기회를 고작 안마의자 때문에 놓쳐버리다니.”


  하지만 형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어둡지 않았다.   

  K형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간 건 이틀이 더 지나서였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거실 중앙에는 말로만 듣던 ‘다 풀려 안마 의자’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반려돌도 있는 세상이라니 의자는 그에비해 양반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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