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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Jun 30. 2024

주문을 외우면 생기는 일

mayol@골계전 17. 카르텔이 해체되는 이유

수학 못하는 사람끼리 앉아서 하는 수다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수학 잘하는 사람들보다 뭔가 끈끈한 동지애가 느껴지고 지나온 아픔도 엇비슷해서인지 고차원적인 이해력이나 방정식을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포자들끼리는 뭉쳐야 살 수 있다는 본능적인 유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런면에서 수학 잘하는 애들은 정말이지 반찬 맛이야!!




중학교 시절 수학 시간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에는 수포자(수학포기자)니 영(어)포자니 공(부)포자니 그런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딱히 그런 표현에 속하지 않은 인포자들이었다.

특히 수학 시간에는 정말 인생 포기하고 싶어 졌으니까.

선생님은 어디서 만들어 오신 건지는 몰라도 손 기름이 잔뜩 베어 반질반질한 적당한 길이와 굵기의 몽둥이를 들고는 교탁 좌측 구석에 다리를 꼬고 앉으셨다.

이 몽둥이로 말할 것 같으면, 놀이동산에 가면 피에로 아저씨가 기다란 풍선을 불어 이리저리 꼬아서 동물도 만들어주고 꽃도 만들어주던 거 기억나시려나. 그렇게 피에로가 입으로 길게 불어낸 풍선이 그대로 뚝 떨어져 묵직한 몽둥이가 되어 선생님 손에 들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대 맞으면 몽둥이 모양 그대로 허벅지가 움푹 파인다. 마치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쳤을 때 생기는 깊은 고랑 같은 게 허벅지에 생기는 거다.

여러분도 그 느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아무튼, 수학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는 몇몇 아이들이 모여 작당을 해야 했다.


"누가 걸리던지 절대 우리끼리는 번호 말하지 않기야. 알았지? 약속!! 참, 오늘 며칠이지?"


이게 무슨 말이냐고?

수학선생님은 칠판 앞에 앉아서 몽둥이를 흔들며 우리들을 노려보셨다.

1초 2초 3초...


'아, 달려 나가서 선생님의 입을 틀어막아 버릴까.'


그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으로 엉덩이를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데 여지없이 들려오는 소리,


"그래, 오늘 며칠이고?"


그러면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24일이요~"

"24일? 좋아. 24번 나와 봐."


24번은 이미 눈꺼풀이 뒤집어져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흐느적거리며 문제를 써놓은 칠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참 이상한 일은, 연습장에다가 하면 잘만 풀리는 문제가 칠판으로 다가가기만 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홍두깨 같은 몽둥이를 흔들고 계시는 선생님 앞을 지나갈 때는, ‘내가 다시 살아서 이 앞을 또 지나올 수는 있는 것일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했다.


"퍽! 으으~ 퍽! 으윽~ 퍼억! 으아~~"


24번이 결국 문제를 풀지 못하고 폭격을 당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맞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마른 대추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자, 다음… 너 몇 번 이랬지? 아, 24번. 넌 들어가고 25번 나와 봐."


25번도 장렬하게 전사하고 나면, ‘제발 시간아 빨리 가라’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처음 호출한 번호에서 +1을 해가며 오름차순으로 부르실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1을 해가며 내림차순으로 부르시는 날이 있어 앞 뒷번호 애들이 모두 초긴장 상태로 선생님의 몽둥이만 쳐다보게 된다.


'24번 다음에 25번?! 아, 오늘은 오름차순으로 부르시는구나.'


1번에서 23번까지는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학 선생님의 호출 방식이 꼭 체계적인 건 아니었다.

번호가 널뛰기하는 날도 있긴 했는데, 가장 두려워했던 날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두드려 맞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일어서는 친구에게, ‘너는 어떤 번호가 좋으냐?’라고 물으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갱년기 남성의 생리현상인지 유독 더 강하게 매를 드셨다.

선생님의 컨디션을 예감하고 친구 몇몇이 서로를 보호하자며 작당을 할 수밖에.


당시 우리 학교는 제일 키 큰 아이를 1번으로 정했었다.

적당한 크기의 내 번호는 6번이었다.

7일 아침 해가 뜨자 어김없이 찾아온 수학시간.

맨 뒷자리에 앉아서 떨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수업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7일이었는데 6번인 내가 왜 긴장을 했냐고?

7번이 결석을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6번이나 8번이 유력한 지명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나와 8번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개놈의 7번은 왜 결석을 한 거야!"


나는 '제발 8번이 걸려라'라고 주문을 외웠다.


'8번이 걸려라, 8번이 걸려라, 8번이 걸려라, 8번이 걸려라. 제발, 8번아 걸려라~'


이미 수업종이 울렸고 선생님께서 교탁을 두드리는 순간까지도 나는, '제발 8번이 걸려라'며 기도하고 있었다.


"잘들 지냈나. 자, 오늘이 며칠이고?"

"8일입니드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고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8일이라꼬? 그래, 8번 나와 봐."


사실 8번과 나와 그 언저리 번호의 몇몇 아이들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원탁의 용사들이기도 했다.

절대 상대의 번호를 말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묵시적 합의가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주문을 외우다가 그만 7일을 8일로 만들어 버린 거였다.

속마음이 입 밖으로 발설되는 순간 교실 안에는 아주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날짜가 잘 못 고지되었다는 사실을 고치려 들지 않았고 나 역시도 위 아랫입술이 서로 달라붙어 비벼대느라 교정이 불가능했다.

아이들은 나와 선생님을 차례로 쳐다보며 묘한 표정이 되었다.


'오늘 재미지겠는데.'


8번은 두 주먹으로 책상을 짚고 일어서서는 나를 노려보더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워낭 소리를 내며 선생님께 다가갔다.


'휴우~'


미안은 했지만, 그래도 내가 걸리지 않은 건 천만다행 아니겠나.


'7번이 결석을 했으니까, 8번 이하 9번 10번... 오늘 하루는 그렇게 끝나겠구나.'


8번이 시간을 끌며 문제만 잘 풀어주면 선생님의 기분도 좋아지면서 화색이 돌 일이었기 때문에 은근히 8번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8번이 칠판 앞으로 가기도 전에 몽둥이를 흔들며 앉아계신 선생님 앞에서 몸을 쭉 뻗는 게 아닌가.


"몸으로 때우겠습니다. 선생님!"

"뭐라꼬? 이 짜슥이!"


선생님은 도전도 안 해보고 포기하는 8번을 평소보다 몇 대 더 때리셨다.

8번의 비명소리를 듣던 반 친구들은 모두들 9번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8번이 엉덩이를 만지며 일어서자 9번의 눈꺼풀이 뒤집히며 흰자위만 보였다. 숨을 안 쉬는 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이 자리로 돌아오고 있던 8번을 불렀다.


"니, 8번. 니는 어떤 숫자를 좋아하노?"


8번은 이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딸꾹"


내 맑은 눈가에 눈물이 고이던 날이었다.

우리의 영원했던 동맹도 깔끔하게 해체되어 버렸고.

그 뒤로 나는 주문같은거 외우지 않는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카르텔 대신 수포자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는 기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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