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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Jun 16. 2024

김삿갓과 이상과 마리서사와 나와

mayol@골계전 15.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

  떠돌다 보면 예기치 않은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예기치 않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하고.


  몇 년 전에는 지방 모 대학의 국문학과 교수님과 몇 차례 만나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김삿갓의 시를 복원하고 연구하는 일이 주된 업무라면서 당신의 서고를 열어주던 날이었다.

  서고 안에 들어서자 조립식 철골프레임으로 짜여진 네모난 책장이 오벨리스크처럼 질서 있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칸칸이 양장본으로 마무리된 김삿갓의 시집들과 다른 고서들이 즐비했다.

  퀘퀘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지만 그런 냄새가 나지 않으면 오래된 책과의 만남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꺼내어 읽다가 다시 꽂아 넣고 다른 책장으로 옮겨가 다시 꺼내어 읽다가 집어넣고… 너무 부러워서 KO패를 당한 심정이었다.

  교수님은 연구비를 받아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책들을 복원했다고 했다.


  "마욜선생, 선생은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자비로 감당한답니까. 혼자 못할 일이에요. 나야 학교에서 돈 받고 나라에서 지원받고 해서 이렇게 결과물들이 나왔지만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김삿갓의 시가 다 한자로 쓰여있으니 복원에만 잠시의 의미가 머물고 다시 창고에 들어가 쌓이고 말지요. 그렇게 보면, 선생은 한글 문학을 복원 발표하려는 노력이니 책만 나오면 읽을 사람이 많지 않겠어요?”


  구구절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WHY⎦는 존재해도 이런 의도를 가진 결과물들이 어떻게 알려져야 하는지 ⎡HOW⎦가 늘 궁핍한 입장이었다.




  시인 김수영이 원고료로 입에 풀칠을 하던 시절에 쌀이라도 팔아올 심정으로 아끼던 사전류들을 들고 종로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허름한 가방에 넣은 두툼한 책 두어 권이 오늘 저녁을 해결할 식량이었다.

  종로 1가에서 내려 인사동에서 익선동으로 이어지는 피맛골 어드매쯤엔 시인 박인환이 열어놓은 중고서점 ⎡마리서사⎦가 있었다.

  평소 박인환의 시어에 불만족한 표현을 했던 김수영의 입장에서는 쭈뼛한 일이었겠지.

  명동의 백작이라는 별칭까지는 아니어도 멋쟁이라는 말이 충분히 어울릴 수려한 외모를 가진 박인환이 큰 눈을 껌뻑이며 입을 쭉 내밀고 책장에 기대어 서있는 수영의 책을 받아 쥐고 더듬거리다가 책값을 쳐 주었을 장면이 그려진다.


  나 역시도 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

  아끼던 수집품을 팔아 돌아오는 길에 생막걸리를 한 병 사고 남은 돈은 꼬깃꼬깃 감춰두고 잊고 지내다가 청계천이나 보수동 골목이나 또 다른 의미의 마리서사에서 지갑을 열고 책을 구해와 잠시의 허기와 시름을 달래니까.




  교수님과 헤어져 나오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혼자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을 하는 건 아닐까. 그냥 내 글에나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갈등이었다.

  그러면서도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헌책방을 구걸하고 다니는 반푼의 삶이다.


목발의길이도세월과더불어점점길어져갔다신어보지도못한채산적山積해가는외짝구두의수효數爻를보면슬프게걸어온거리距離가짐작되었다종시제자신은지상의수목樹木의다음가는것이라고생각하였다 - 李箱의 <척각隻脚>

 

  이상은 척각隻脚 즉, 외다리를 통해 기울어진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목발을 짚고 한쪽 다리로만 걸어야 하는 불구가 신어보지도 못하고 쌓여만 가는 한쪽 구두들을 보며 힘겹게 걸어온 삶을 반추해보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글이다.

  

  김삿갓이. 대접할 만한 게 소반에 죽 한 그릇이 최선인 주인장을 위로하며 쓴 시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삶에 대하여,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혀져 억지로 위로를 당겨 받는 하루다.


四角松盤粥一器 사반송반죽일기 ; 다리가 넷인 소나무 소반에 놓인 죽 한 그릇에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 햇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노는구나
主人某道無顔色 주인모도무안색 ; 주인아, 내게 미안하다 말하지 말아라
吾愛靑山倒水來 오애청산도수래 ; 나는 물에 비친 청산을 좋아한단다

  

   '그래, 내 사정이 이렇다고 고개를 떨굴 필요는 없겠지. 소반에 올려진 죽 한 그릇이 나의 삶이고 나는 그 시간을 떠먹는 나그네일 뿐이니까.'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그러니 냉각수 통이 깨진 오래된 낡은 차의 보닛을 열고 내리쬐는 볕과 끓는 지열 사이에 서서 비난하는 사람들의 눈총 속에서도 웃을 수 밖에.

  '내게 미안해야 할 것은 나 밖에 없다'는 한심한 날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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