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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ug 01. 2024

영도선零度線, 4294

mayol@행화촌 10. 봉이 이야기 - 박용수 편

 나의 열정과 노력과 역사를 꼼꼼히 기록해서 선보이는데 경매까지는 아니어도 값어치를 매기지 못한 채 마음 밖으로 내보내면 비로소 마음이 호젓해질까.

 동인지 <영도선>의 시인들은 그런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책의 끝에 가격 대신 이런 문구를 집어넣었다.


 (非賣品비매품)


 영도선을 한 권 두권 모으면서 책을 덮을 때마다 이런 그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아무나 가져가라.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다. 대신 꼭 읽어주라."


 단기 4294년 시월 말에 경남 진주의 대륙출판사에서 영도선 제2집을 인쇄했다.

 이때 장정을 맡은 이가 추연근화백(1924~2013)이다.

 표지를 본 첫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한자 ⎡영零⎦은 '떨어지는 비'를 의미한다. 그것도 조용히 떨어지는 비다.

 그래서인지 장정에서 거미줄처럼 느껴지는 선들에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빗방울이라도 맺혀있을까.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이 느껴지기도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무수히 쌓인 방울들이 한데 섞여 흘러가는 것도 느껴진다.


    目次>


    슬픈 계절季節 - 이덕

    목교木橋에 호롱불이 피면 - 문의식

    미소微少의 문門 - 조인영

    전상이후戰傷以後 - 박용수


 영도선은 발행 시기에 따라 참여한 시인이 조금씩 다르다.

 그중 제2 시집을 골라서 소개한다.

 이중에서도 오늘은 시인 박용수에 대해 읽어보려고 한다.


 오래전에 서울 한복판에는 허바허바 사진관이라는 유명한 사진관이 있었다.

 당대 유명인들이 이곳에서 초상사진을 찍었고 그곳에 일자리를 얻어 상경한 시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박용수朴容秀였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성장하던 그가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입은 건 진주 중학교 재학 중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장티푸스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얻은 병이었다.

 학교를 중퇴한 용수는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카메라를 구해 들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르포사진’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남긴 수만 장의 사진 역시 민주화 운동의 현장들을 기록한 것들이어서 지금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 기증된 상태다.

 그런 그가 서울로 상경하게 된 계기는 허바허바 사진관에 취직한 때문이었다.

 그는 허바허바 사진관에서 사진기사로 일하며 시작詩作도 활발하게 했다.

 그때가 60년대였고 문단에 데뷔한 때이기도 했다.

 조인영, 박용수, 이덕, 문의식 등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동인지를 만들기로 하고 표제를 <영도선零度線>이라 지었다.

 영하를 가르는 온도라기보다 자작자작 비가 내리는 날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도 추측해 보았지만 그들의 의견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가로로 그은 선線]


이라고 짤막하게만 표제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나의 짧은 해석보다는, ‘가로로 길게 그은 선’이 가지는 의미가 훨씬 더 깊고 풍부해서 쉽게 잊히지 않는 동인지로도 기억이 된다.

 이 시집은 1961년에 판매용이 아니라 비매품으로 출판을 해서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박용수는 이 동인지를 통해서 문단에 데뷔를 했고 데뷔 이후에는 사진가로서도 또한 시인으로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의 업적 중에서도 눈의 띄는 업적이 하나 있다면 시어를 모아 펴낸 <우리말 갈래사전>이 있다.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창작자를 위한 책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시인으로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카메라를 들었다'는 그의 회고가 마음에 남는다.



 <봉이 이야기 - 박용수의 변>


 이 식어빠진 죽사발도 봉이 김선달의 재간을 지니지 못한 내 손에서 영 썩어버리나 했더니 동인들의 고마운 덕으로 이 네거리 한 구석에 판을 채려 내 놓게 된다.

 하지만 요지음같은 세상에 숫가락 끝이라도 대어 볼 바보가 있기를 바랜다는것 조차 도시 어리석은 일이니 이건 도무지 얼굴뜨거운 꼴이 되기 십상이겠다.

 그래도 선달 벼슬이나 할 욕심에서 이 짓을 말지 못하니 이러다가 정작 염병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불안한 노릇이다.

 다만 엉뚱한 기적이라도 있기를 바래고 싶다.



    ▶︎ 합창合唱하는 아메바


    그리하여

    상실된 공허속에 나와 앉으면

    삶처럼 줄기찬 행진과

    선회旋廻하는 저기압의 돌풍突風속을


    다시

    미지수未知數의 계산대 키를 뚜드리는

    견습 사무원의 불안한 손끝과

    대화의 생성이 수림樹林처럼 무성한 그늘에서


    오늘은.

    맞선 평행선의 궤도위에 줄 지은

    유기遺棄된 부랑아의 대열이 합창하는 것

    그건 항변의 침묵을 지키는 예쁜 입상立像과

    폐허된 석탑의 파편 주의周圍.


    파란 창공이 쏟아저 오는

    계절의 밤

    상가의 색등色燈이 휴식하는 몸부림


    가쁜한 나래깃에

    예약된 밤은 회색진 그늘 저 쪽에 있고.


    ▶︎ 창窓


    연륜이란 것은

    찢겨 진 봉창에 때 묻은 전설을 남긴

    세월이라고 한다.


    바람이 지날 때 마다

    못다 핀 계절이 묻어 가는 회색 구름과

    구름을 이어 중중이 떠 간 사연들이며

    한것 드높게 푸르럴 수만 없어

    피(血) 듣는 하늘이 휘감켜 오는 데서

    창을 향하여 휘황히 밝은 밤도 있었다.


    어미는 자장가도 없이 나를 잠 재웠고

    마을마다 징을 치며 이웃을 부른 데서

    강산을 좁아도 삼천리는 아득히 먼 거리였고,

    골 골을 주름 잡아 땅을 파고 있었던

    허리 굽은 내력來歷은 윤회輪廻하여 왔는데.


    창은 아득히 높게 달려 있고

    나는, 발 돋움에도 자랄 수 없는 민족.

    용암溶暗된 밤으로 손을 휘저으면서,

    아기처럼 엉석을 떨며 울고 싶었다

    아, 조상은 무덤으로 남고 마는가.


    오천년이 자랑으로 총생叢生된 창경窓境에서

    어미는 즐겁게 춤을 추고 있고,

    나는 화려한 아침이 들기를 기다린다.



 후기>


 이것은 <零度線영도선>이 <제2선>까지 달려 온 現況中繼현황중계가 된다.

 한국의 풍토 이기에 피할 수 없었던 난코스의 고충은 이런 길을 지나쳐 본 분이면 다들 잘 알만한 일이기에 추억담은 말겠고.

 도시 흥미없을 이 경주를 구경해 주신 여러분께는 손이라도 흔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앞으로의 무수한 능선을 추윤근화백께와 대륙출판사 여러분께 깊은 사의를 표한다.

 - 辛丑신축 시월 末 <詩家族시가족> 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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