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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ug 08. 2024

李箱의 '無題'

mayol@행화촌 11. 황獚과 이상李箱의 동행同行과 그 비예睥睨

 모든 것을 참고 사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다.

 그런데 심각성에 비해 정신과 의사의 처방은 간단하다.


 "화가 나면 화를 내세요!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소리를 지르시고요! 욕을 하고 싶으면 욕을 하시고 주먹을 휘두르고 싶으면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환경에서 마음껏 주먹을 휘두르시고요!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는 웃으시고요. 그래야 속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거예요! 선생님, 퐈이링!"


 처방대로 하면, 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을 인적이 뜸한 골목에 들어가 소리 지르고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발길질을 하면서 크게 웃다가 울면, 미쳤다는 소리 듣는다. 이러나 저러나 딱한 일이다.

 처방 없이도 저런 행동을 하며 살다 간 시인이 하나 생각이 나서 사설이 길었다.

 이상이 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인 李箱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아 회자되기도 하는데, 가장 기이하고도 안타까운 부분은 그의 유고집遺稿集에 관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청계천 산책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오래된 물건을 구경하기 위해 황학동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좋아서였고 또 한 가지는 평화시장을 옆에 끼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헌책방을 순회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버릇처럼 한 권 한 권 사 모은 것이 지금은 제법 양이되어 조심스럽게 펼쳐보는 또 다른 행복을 주고 있다.

 이 오래된 책방거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이상의 유고집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은 거다.

 무슨 말이냐고?

 이상의 유고집이 발견된 곳이 다름 아닌 내가 줄곧 걸어 다녔던 청계천의 한 헌책방이어서 하는 말이다. 글 속의 표현처럼, 이상의 유고 수첩이 나를 '비예睥睨(곁눈질로 흘겨보다)'한 게 아닌가 싶다.


 당시 이상의 노트를 발견한 사람은 조연현 교수라고 알려져 있다.

 우연히 헌책방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던 조연현의 눈에 두툼한 노트가 한 권 들어왔다.

 일본어와 한자 그리고 한글들이 드문드문 경쟁하듯 빽빽하게 채워진 노트였다.

 헐값을 치르고 노트를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에서 숨진 이상의 노트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깨알 같은 글자들과 기호들로 채워진 이상의 노트는 조연현의 손을 거쳐 김윤성에게 전해졌고 그의 손에서 하나둘씩 해독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유고집은 이어령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본에서 숨을 거둔 이상의 유고집이 어떤 이유로 청계천의 한 헌책방에서 발견이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상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내와 지인들이 한걸음에 달려가 상을 치르고 유품을 정리했을 텐데 어떻게 그 중요한 노트가 그들 손에 들려 조선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저 혼자서 구천을 헤매다가 현해탄을 건너와 청계천 헌책방으로 기어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아님 유족들이 헌책방에 팔아버렸을까?

 어떤 날은 다리품을 팔고 어떤 날은 책상 머리맡에 앉아 상상으로 채워가는 이야기이다.

 당시에 김윤성이 번역한 유고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제목은 '무제'


무제無題

1

땀이 꽃속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문밖을 나섰을 때 열풍烈風이 나의 살갗을 빼앗었다.
기러기의 분열分列과 나란히 떠나는 낙엽落葉의 귀향歸鄕, 散兵들 ……
몽상夢想하는 일은 유쾌한 일이다. ……
제천祭天의 발자욱소리를 작곡作曲하며, 혼자 신이 나서 기뻐했다. 차디찬 것이 나의 뺨에 ……
기괴奇怪한 휘파람소리는 또다시 아궁이에 생나무를 지피고 있다.
눈과 귀가 토끼와 거북이처럼 그 철조망鐵條網을 넘어 수풀을 헤치며 갔다.
第 一의 현지玄, 녹이 슨 금환金環, 가을을 잊어버린 양치류羊齒類의 눈물, 훈유래왕薰蕕來往.
아침해는 어스름에 등즙橙汁을 띄운다.
나는 第 二의 玄에다 차디찬 발바닥을 문질렀다.
금환金環은 천추千秋의 한恨을 돌길에다 물들였다. 돌층계의 각자刻字는 안질眼疾을 앓고 있다. …… 백발노인白髮老人과 같이 …… 나란히 앉아있다.
기괴奇怪한 휘파람소리는 눈앞에 있다. 과연 奇怪한 휘파람소리는 눈앞에 있었다.

한 마리의 개가 쇠창살 안에 갇혀있다.
양치류羊齒類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만국기萬國旗처럼 쇠창살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가로운 아방궁阿房宮의 뒤뜰이다.
문패 - 나는 이 문패를 간신히 발견해냈다고 하자 - 에 연호年號같은 것이 씌어져 있다.
새한테 쪼인 글씨 이외에도 나는 얼마간의 아라비아 수자數字를 읽을 수 있었다.
황獚.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서있다.
…… 먹이를 주자. …… 나는 단장을 분질렀다. 아문젠翁의 식사食事와같이 말라 있어라. 순간,
…… 당신은 마드무아젤 나시MADEMOISELLE NASHI를 잘 아십니까, 저는 그녀에게 유패幽閉당하고 있답니다. ……. 나는 숨을 죽였다.
…… 아냐, 이젠 가망 없다고 생각하네. …… 개는 구식舊式처럼 보이는 피스톨을 입에 물고 있다. 그것을 내게 내미는 것이다. …… 제발 부탁이네, 그녀를 죽여다오, 제발 …… 하고 그만 울면서 쓰러진다.
어스름 속을 헤치고 공복空腹을 운반한다. 나의 안 대袋는 무겁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내일과 내일과 다시 또 내일을 위해 나는 깊은 잠속에 빠져들었다.
발견發見의 기쁨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빨리 發見의 두려움으로 또 슬픔으로 전환轉換한 것일까, 이에 대對해 나는 숙고熟考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꿈까지도 나의 감龕(감실. 종교적으로 신위나 불상을 모시는 장소)으로부터 추방追放했다.
우울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지나고 머지낳아 멱糸과 같은 봄이 와서 나를 피避해갔다. 나는 피스톨처럼 거무스레 수척해진 몸을 내 깊은 금침속에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했다.
꿈은 공공연하게 나를 학사虐使(모질게)했다. 탄환彈丸은 지옥地獄의 건초乾草모양 시들었다. - 건강체健康體인 그대로 -

2

나는 개 앞에서 팔뚝을 걷어붙여 보였다. 맥박脈搏의 몬테 크리스트처럼 뼈를 파헤치고 있었다. …… 나의 묘굴墓掘 ……
四月이 절망絶望에게 MICROBE와 같은 희망希望을 플러스한데 대해, 개는 슬프게 이야기했다.
꽃이 매춘부賣春婦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안심을 하고 ……
나는 피스톨을 꺼내보였다, 개는 백발노인白髮老人처럼 웃었다. …… 수염을 단 채 떨어져나간 턱.
개는 면綿을 토했다.
봉蜂의 충실忠實은 진달래를 흩뿌려 놓았다.
내 일과日課의 중복重複과 함께 개는 나에게 따랐다. 돌과같은 비가 내려도 나는 개와 만나고 싶었다. …… 개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개와 나는 어느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 죽음을 각오覺悟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없는 문패 이면裏面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裏面만을 바라보고는 분만憤懣과 염세厭世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리고 괴로와하는 모양이다.
개는 내 눈앞에서 그것을 비예했다.
…… 나는 내가 싫다. …… 나는 가슴속이 막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 어디? ……
개는 고향故鄕얘기를 하듯 말했다. 개의 얼굴은 우울憂鬱한 표정表情을 하고 있다.
…… 동양東洋사람도 왔었지. 나는 東洋사람을 좋아했다, 나는 東洋사람을 연구硏究했다. 나는 東洋사람의 시체屍體로부터 마침내 東洋문자文字의 오의奧義를 발굴發掘한 것이다. ……
…… 자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말하자면 내가 東洋사람이라는 단순한 理由이지? ……
…… 얘기는 좀 다르다. 자네, 그 문패에 쓰여져 있는 글씨를 가르쳐 주지 않겠나? ……
…… 지워져서 잘 모르지만, 아마 자네의 生年月日이라도 쓰여져 있었겠지 ……
…… 아니 그것 뿐인가? ……
…… 글쎄, 또 있는 것같지만, 어쨋든 자네 고향故鄕 지명地名같기도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 ……
내가 피우고 있는 담배연기가, 바람과 양치류羊齒類때문에 수목樹木과 같이 사라지면서도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 아아, 죽음의 숲이 그립다. …… 개는 안팎을 번갈아가며 뒤채어 보이고 있다. 오렌지빛 구름에 노스탈쟈를 호소呼訴하고 있다.



 말씀드린 대로, 위의 시 ‘무제無題’의 번역은 김윤성金潤成이 한 것이다.

 당시 김윤성은 ‘황獚’이라는 한자를 ‘누런 개’라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밝혔지만, 그것이 정말 누런 개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시를 읽을수록 잘 모르겠다.

 오히려 ‘커다란 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고 그 개는 결국 이상 자신의 독백처럼 분열된 화신으로 대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암호 같은 그의 시는 세상을 비꼬기라도 하는 듯이 비틀어져 있고 그것은 당시의 모순된 지식인의 삶에 대한 비관과 이상 자신이 가지는 이상理想과의 괴리 속에서 잡초처럼 자라는 글자들이었다.

 이상理想을 좇던 이상李箱이 더 이상異常해지는 기이한 시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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