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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링 Feb 26. 2024

봄, 여름, 가을 지나 겨울

윈도우 배경화면 속 풍경 


그림 같은 풍경. 멋진 설산에 넋을 놓게 되는 것도 찰나. 어느 순간 낯설고 멋지게만 보였던 풍경들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7일 차가 되자 방문을 열고 나오면 아득하게 펼쳐진 설경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편해진다는 것. 익숙해진다는 것은 감동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눈 쌓인 풍경에 익숙해질 때쯤 키르기스스탄은 보물 같은 새로운 조각을 가져다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만년설을 바라보며 영하 10도~20도를 왔다 갔다 하는 날씨 속에서 추위를 견뎌가며 눈을 밟았다. 그런데 1시간 정도 달렸을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겨울왕국에서 뛰어놀던 내가 어느샌가 봄의 나라에 와있다. 해발고도 2000~4000m를 넘나 든다는 것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날씨와 온도, 풍경을 의미하는 걸까. 



만년설 그다음 여정은 '독수리 사냥'이다. 조련된 독수리를 날려 사냥을 한다. 독수리 사냥 체험을 위해 조련사와 눈을 가린 독수리가 함께 등장했다. 5살이 된 독수리는 생후 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사람의 손에서 자랐다. 자연에서는 여우나 토끼를 사냥하는 상위 포식자지만 자신을 키워주는 조련사 앞에서는 마냥 아기 같았다. 조련사도 이를 아는지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했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자신을 키워주고 정을 준 사람에게는 한없이 어린아이가 된다. 우리에게 사냥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 명 한 명의 손에 붙들려 사진을 찍히기도 한 어린 독수리. 독수리는 이날 우리를 만나는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끽끽 대는 힘겨운 울음소리를 내뿜었다. 왜 우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눈을 가리고 있는 독수리가 안쓰러웠다.



사실 나는 조류 공포증이 있다. 다들 그렇게 매콤한 닭발을 즐겨 먹던데 나는 보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치킨은 안 먹냐고 물어보면.... 모순적이게도 그렇지 않다. 치킨은 잘 먹는다. 너무 징그럽고 무서워서 다 잡아먹어 버리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닭의 그 얼굴과 발은 보는 것만으로도... 으 내 스타일이 아니다. 물론 닭도 나를 안 좋아하겠지만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조류 '비둘기'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일등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거리를 걸을 때 비둘기 떼가 모여있으면 그 앞을 못 지나가서 빙 둘러 가다가 학교에 지각하기도 부지기수였다. 


3N살이 된 나는 여전히 조류 공포증이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릴 때는 근처에 가기도 싫었던 것들을 지금은 조금 참아낼 수 있게 됐다는 것. 독수리도 너무 무섭고 싫지만 독수리 곁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내가 훨씬 덩치도 크고 나를 해치는 것도 아닌데 잔뜩 겁먹을 먹어서 온몸이 굳어버렸다. 눈도 못 마주치는 나는 무거운 독수리를 한 손으로 낑낑대며 얹어놨다. 펄럭이는 날개 밑으로 나는 눈을 내리깔고 일행들이 사진을 빠르게 찍어주기를 기다렸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사진을 보기 싫어서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것이다. 독수리와 인증사진은 남겨야지.   



어린 독수리의 우는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질 때쯤 청량한 풍경이 눈에 담긴다. '동화'라는 뜻의 '스카스카' 캐년에 다다를 때쯤 이식쿨 호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제주도의 3~4배 면적인 이 호수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식쿨 호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빙하가 녹아 형성된 산정 호수다. 바다와 2600km 떨어져 있지만, 평균 1%의 염도를 형성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캐년과 그 너머로 보이는 호수. 방금 전까지 만년설을 바라보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봄에서 여름으로 날씨가 바뀌었다. 내가 보고 있는 풍경, 내가 밟고 있는 땅이 현실인가? 이제는 환상 속에 있는 것처럼 새롭다.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단숨에 스카스카캐년 꼭대기에 올라갔다. 새파란 하늘과 붉은 캐년. 윈도우 컴퓨터 배경화면에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진짜가 맞다. 이 여행의 시작과 끝은 어디까지일까. 아직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남아있는 걸까.



마지막 여정인 '알라아르차 국립공원' 다시 얼굴과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의 나라로 돌아왔다. 목을 직각으로 꺾어서 올려다봐야만 끝이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이 가득한 곳. 이곳에는 청설모와 여우, 멧돼지 등 신기한 동물들이 출몰한다고 한다. 나는 청설모를 만나면 주기 위해 집에서 해바라기씨를 챙겨 왔다. 빵과 땅콩도 한 줌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공원 입구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새들이 사람 근처에 모여들었다. 땅콩을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새들이 손바닥에 앉아 땅콩을 홀랑 집어갔다. 나도 주섬주섬 가져온 땅콩과 빵조각을 꺼냈다. 그때 새들이 날아들어왔는데 나도 모르게 땅콩을 놓쳐버렸다. '맞다 나 조류공포증 있지...' 작은 새들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행들에게 땅콩을 넘겨주고 먼발치서 귀엽게 땅콩을 얻어가는 새들을 지켜만 봤다.



비슈케크로 돌아와서 마지막날. 우리가 가는 게 아쉬운지 비슈케크에 눈이 펑펑 내렸다. 눈길을 뚫고 나는 숙소에서 15~20분 거리에 있는 쇼핑센터에 구경을 갔다. 컵받침과 요르따, 벽에 거는 장식품 등 핸드메이드 기념품을 이것저것 챙겨 검은 봉지에 차곡차곡 담아왔다. 눈송이가 너무 커서 눈은 빠르게 쌓였고, 금세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오분만 걸어도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일 정도였다. 눈이 오니 시끄럽던 자동차 경적소리도 잠잠해졌고 도시를 덮고 있던 매연도 차갑게 얼어버렸다. 정신없는 풍경이지만 고요한 도시를 잠시 바라보며 하루를 돌아봤다. 정말 많은 풍경의 조각을 담았구나. 아쉽지 않은 아니 분에 넘치는 7박 9일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즐거운 시간은 야속하게도 참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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