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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링 Feb 19. 2024

해발 4000m에서 만난 만년설

차오르는 호흡을 느끼며 발자국을 새기다


만년설(萬年雪)은 고산 지대나 빙설 기후대와 같은 고위도 지역에서 낮은 기온으로 인해 눈이 내리는 양이 녹는 양보다 많아 1년 내내 쌓여있는 것을 말한다. 만(萬)은 단순히 숫자 10,000을 뜻하기도 하지만 '영원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만년설은 1만 년이나 될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녹지 않는 눈이라는 의미가 된다.



1월에 태어난 나는 눈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눈이 펑펑 내리면 동네 뒷동산에 올라가서 눈썰매를 타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며 놀았다. 내 생일 즈음이면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주는 달콤한 세상을 누비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새해와 함께 내 생일이 찾아왔다. 딸기가 송송 박힌 눈처럼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따뜻한 집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창밖에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있을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20살이 되고 30살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느 순간 눈은 나에게 '귀찮은 존재'로 전락했다. 눈 내리는 것을 보면 '아 차 막히겠다. 집에 어떻게 가지?', '내일 출근길은 빙판길이겠군'이런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동심을 잃은 것일까. 살다 보니 감상할 시간도 사치라는 것을 깨닫고 그저 무미건조하게 하루하루를 지나왔다.    



그런 내가 키르기스스탄에서 만난 '눈'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애초에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만년설'이었다. '내가 언제 그런 곳에 가서 만년설을 밟아보겠어'막연한 호기심과 기대감, 설렘까지 공존하며 복합적인 감정들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4000m 아벨라고원으로 가는 길은 평소와 다른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봤던 풍경은 내 경험치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10살로 돌아가서 크리스마스와 내 생일이 있는 겨울을 기다리는 것 같이 설렜다.  



빠르게 달리는 차 밑으로는 돌들이 튀어나가는 소리가 느껴졌다. 푸른 숲이었던 산들에 어느새 눈이 섞이기 시작한다. 점차 산 정상에 다다르고 있구나. 커피가 섞인 아이스크림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한입 떠먹으면 아몬드봉봉 혹은 엄마는외계인 맛이 날 것 같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 맛이 입안에 맴돈다. 그저 풍경을 눈에 담았을 뿐인데 입안에 단맛이 가득 차오른다.  



카니발 네 대가 도착한 아벨라 고원. 아무도 밟지 않은 그 땅에 멈춰 섰다. 한 명씩 차례로 내리는데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던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다. 영하 15도. 체감 온도는 영하 25도. 내놓은 얼굴이 꽁꽁 얼어버릴 것처럼 차갑고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5분 만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감각을 잃었다.

 


눈을 보니 어린 시절 내가 떠올랐다. 쌓인 눈만 있으면 하루종일 깔깔대고 웃으며 뛰어놀았던 그 시간들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눈 속으로 뛰어드니 어떤 곳은 눈이 무릎까지 쌓여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새하얀 눈 위에는 내 발자국이 하나 둘 찍힌다. 다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밭을 뛰어다녔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크림같이 부드러운 눈의 표면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생크림 케이크를 닮아있다. 어린 시절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속을 가득 채운 생크림처럼 포근하고 달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밟아보니 쌓인 눈들이 제법 단단했다. 거센 바람이 불면서 표면은 부드럽게 점점 더 깎여갔고, 속은 더 단단해졌나 보다.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이 무거웠다. 깊은 눈 속을 뛰어들어가던 나는 눈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데 눈에 걸려서 넘어지다니! 왠지 그 순간 웃음이 터졌다. 급하게 갈 필요 없다고 천천히 가라고 눈이 나를 앉혀둔 것 같았다. 그래 바쁜 일도 없는데, 그동안 내 마음만 조급했구나. 넘어진 김에 쉬어가야지.    



넘어진 김에 냅다 누워본다. 역시나 햇빛이 강렬해서 맨눈으로는 하늘을 바라볼 수 조차 없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날씨가 허락해 줘야 올 수 있는 이곳에 온 오늘은 우리의 여행 일정 중 가장 맑고 쨍한 하늘을 보여줬다. 누워서 가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본다. 고산지대라 한번 차오른 숨이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이 순간 나는 10살의 나로 돌아갔다. 그때의 나는 어떤 고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숙제를 안 해서 선생님께 혼날까 봐 걱정했겠지. 학교 끝나고 친구랑 놀이터 갈 생각에 행복했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10살의 나, 20살의 나, 지금의 나는 항상 불안했다. 남들을 보느라 나를 돌아보지 못했다. 뒤처질까 봐 불안했고 더 열심히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앞만 보며 달려온 무수한 시간들을 갑자기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 쉬는 김에 누웠다 가자.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가보자.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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