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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Jul 06. 2023

겨울이 갔다

2023년 2월 설악산 토왕성폭포



겨울이 갔다.


산에 어서 눈에 내리기를 세 계절동안 기다리는 사람에게, 겨울이 간다는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1월 초에 이상 고온으로 무려 15도까지 올라 눈이 싹 녹아버리고 모든 것이 '리셋'되었던  올해 같은 겨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일주일 전인 2월 19일, 점차 위력을 잃어가는 추위를 아쉬워하며 설악산에 겨울 고별 산행을 갔었다.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이었다. 느즈막히 오전 8시 30분쯤 설악동에 차를 주차하고, 양폭산장 지나 아직 녹지 않은 천당폭포까지 슬슬 걸어서 왕복했다. 이제 곧 3월. 이삼 주만 지나면 하얗던 산은 말 그대로 눈녹듯이 사라지고 나는 또한번 마음에 나이테를 두르게 되겠지, 이렇게 점점 마음이 두꺼워져가는 것은 좋은 일일까 슬픈 일일까....


이런 청승맞은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던 2월 24일 목요일, 강원도 영동 지방에 대설주의보와 함께 폭설이 내렸다. 그리고 다음날, 누군가의 블로그에 토왕성폭포 사진이 올라왔다. 설악동에서 멀리 보이는, 저기 높은 하늘에 하얗게 얼어붙은 토왕폭이었다. 전날 찍은 사진이란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토왕성폭포는 아직도 얼어 있구나. 그 사진을 캡쳐해서 카톡으로 돌렸다.


그리고 당연히 또 설악산으로 향했다. 3월 1일부터 시작되는 봄철 국립공원 입산금지 기간, 그 전 마지막 주말이었다.


겨울이 가다니 무슨 소리. 아직 꽝꽝 얼어붙은 한겨울의 설악산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한참 졸다가, 도착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허겁지겁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새벽 세시 반. 비몽사몽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자 버스는 휭 떠나버렸다.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아직 제정신이 안 돌아와서인가?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깜깜했고, 아무도 없었다.


"버스 잘못 내린거 아냐? 여기가 어디야?"


주말이면 새벽마다 버스와 인파로 난리 북새통이 벌어지는 주차장 앞이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아직 눈 냄새가 묻어 있는 차가운 바람만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채 손님들로 북적여야 마땅한 가게들은 전부 깜깜했다.  


전날까지 폭설로 입산통제가 되었던 탓일까, 아니면 봄철 입산금지 직전 주말이기에 산도 파장 분위기인 것일까, 사람이 없었다. 어쩐지, 내릴때 버스에 우리 넷만 남아있던 것부터 이상하긴 했다.


저쪽 홀로 불켜진 매표소 건물이 외로워보이.... 아니지, 저놈의 징그러운 매표소는 닫지도 않는다. 온 국민이 사랑하는 외설악 전체, 그러니까 북쪽 미시령 계곡부터 남쪽 화채능선까지 그 전부가 사유지라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가게에서 커피도 사고 아침밥도 먹자던 계획이 틀어졌다. 불꺼진 가게 앞에 앉아 스패츠 착용하고 랜턴 꺼내고 이런저런 산행 준비를 하는데 배낭 안에 들어있는 이따만한 대형 보온병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는 가게에서 뜨거운 커피를 담아 가려 했는데 쓸데없는 짐이 되어 버렸다.


산에 가면서 속세의 가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해야지. 겨울산이 원래 이렇게 사람없고 썰렁해야 진짜지. 오늘 사람도 없고 엄청 좋겠네. 온갖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보지만 배낭에 빈 보온병 하나 들은 게 뭐 그리 대수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철갑을 두른듯 바람 서리 불변하는 튼튼한 보온병이라 무겁기도 하다.




늘 그랬듯 비룡폭포 지나서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해뜨기를 기다렸다. 다른 계절 같으면 경원대길이나 별을 따는 소년 릿지 등반팀 등등이 지나가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다. 겨울의 막판이라 토왕폭 등반가는 팀도 없을 듯했다.


혼자 오신 한 분이 엄청 큰 배낭을 지고 묵묵히 헤드랜턴을 비추며 지나갔다. 배낭을 보니 우리 같은 날나리 등산객은 아니고 등반하는 분인데, 설마 토폭 등반팀이 위에 있나?


새벽 다섯 시. 추웠다. 영하 3도 정도. 시간이 더디 갔다.


일행 중 잠보가 있다. 아무리 지루해도 그렇지 이 추운 데서 잘 생각을 하다니...


어느 정도 밝아졌기에 배낭을 메고 토왕골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밝아오는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저 위 토왕성폭포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곳에 오면 늘 그렇듯, 오늘도 등 뒤로 노적봉이 아침 햇살에 붉게 빛나기 시작한다.


토왕폭 우측 벽으로 올라갈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오늘의 계획은 토왕폭 아래에 가서 잠시 그 위용을 우러르고 나서, 계곡을 되짚어 내려와 별따능선 하산루트를 통해서 능선에 올라간 뒤, 은벽길을 지나 설악동 C지구로 하산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걱정이라면 토왕폭 가는 길에 우측으로 바위를 트래버스해야 하는 지점이다. 혹시나 해서 보조자일을 챙겨오긴 했지만 평소처럼 고정 로프가 매여있기를 바랐다. 빙벽 등반팀들이 많이 오갔을 터이니 십중팔구 안전장치가 되어 있겠지만 만약 얼어붙은 바위를 건너가야 한다면.. 음...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얼어붙은 토왕폭 하단 위로 길이 아주 잘 나 있었다. 평소엔 물이 떨어져내리는 협곡인데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토왕폭 3단에는 고정자일도 설치되어 있었다. 50미터 쯤 돼 보이던데 이렇게 너그럽고 고마운 분이 있을수가. 물론 등반팀 사용 목적이고 우리같은 사람을 위해 해 놓은 것은 아니겠지만 상관없다. 어느 팀인지 몰라도 복 받으실 거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우리는 토왕폭에 도착했다.

이 경외의 순간이 사진에는 도저히 담기지 않는다


아, 숨이 콱 막힌다.


푸르스름하게 얼어붙은 산과, 그래서 더 파랗게 보이는 하늘.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도 없이 정적만이 감도는 깊은 협곡에 우리들의 대화 소리가 메아리로 울렸다.


설악산에 올 때면 늘 긴장되고 떨린다. 그렇게 좋아하는 산이건만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이면 늘 걱정되고 부담이 된다. 산의 생김새부터가 이런 식인데 마음이 마냥 푸근할 수는 없겠지.


경탄하며 감상하는 중에도 어딘가 숨을 편하게 쉴 수 없게 하는 이상한 위엄이 있다. 그래서 설악산은 편한 친구같은 존재라기보다는 경외와 숭배의 대상에 더 가까운 것도 같다.  


아쉬움을 담고 발걸음을 되돌린다


누군가 남겨놓은 고정자일


그런데 아까 새벽에 혼자 올라갔던 분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우리가 사진 찍고 놀고 있는 동안 폭포 2단 옆 동굴에서 등반 준비를 하고 있었나보다. 등에 로프 한 동을 동여맨 그분은 토왕폭 왼쪽 바위벽을 아이스바일로 찍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이지만 이 분


아니 혼자서? 이것이 말로만 듣던 프리솔로? 아니면 우회해서 올라간 다음에 줄 내리고 빙벽 연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이런 용감한 분들에겐 늘 존경심이 인다. 일행이 다 내려가고도 한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등 뒤로 쇠와 바위의 마찰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별따 하산로를 통해 능선에 올랐다. 별따 마지막 봉우리에 사진 찍으러 가고 싶었으나 눈이 살짝 덮인 바위가 무서워 포기했다.


은벽길로 가로질러 가는 길. 응달진 북사면에 길이 없어서 간만에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밀치며 길을 뚫었다. 눈에서 길 뚫는 걸 '러셀한다'고들 많이 했는데, 난 예전에 그것이 무슨 등반 전문 용어인 줄 알았다. 알고봤더니 20세기 초반 일본에 수입되던 제설차의 메이커가 Russell이라는 회사였다고 한다. 그런 일본식 용어임을 알고는 웬만하면 러셀이라는 단어를 안 쓰려 노력하는데, 가끔 입에 붙어서 무심결에 나오는 건 어쩔수가 없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 눈 뚫는 행위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푹 밟고 허벅지로 눈을 밀고, 다른 발로 밟고 허벅지로 밀고.... 아무 생각없이 이런 단순 노동을 할 때면 정말 무의식적으로,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20대 초반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든다. 크게 힘들지도 않다.  


기억이 뇌가 아니라 몸에 저장된다는 이론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기억이란 놀라운 것이다.  오래 전, 다른 모든 것을 망각 혹은 외면하고 미친듯이 산에만 다니던 그 때의 기억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은벽길에 올랐다. 어제까지의 대설주의보가 무색하게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하얀 산을 빛냈다.


은벽길에 올라 되돌아보는 토왕성폭포. 어찌 저 하늘 높은 곳에 폭포가 걸려 있는지.



하산길에 보이는 울산바위. 그 너머 상봉, 신선봉


하지만 얼어붙은 토왕폭에서 막 걸어나온 우리의 하산길엔 눈보다 땅이 더 많이 보였다. 눈 그친지 겨우 하루. 남쪽 사면은 이미 다 녹아 있다.


정말로 겨울이 물러가고 있나보다.  


이제 다음주면 설악산은 입산금지다.


오늘 아침까진 겨울이 오래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아니 지나친 일반화일지도 모르니 나의 마음은, 참 간사하기만 하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겨울 산행을 했다고 생각하니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봄엔 산에 봄꽃이 피기도 하지만, 눈 내리는 다음 겨울산을 손꼽아 기다리는 재미가 시작되는 계절이기도 하니까.





이 산행의 GPX는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10118/575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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