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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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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Aug 28. 2023

산 꼭대기의 그 분

2023년 8월 충북 영동 백화산 주행봉


"가서 하루밤 텐트에서 자고 싶은 산이 있는데...."

"어디?"


"충북 영동에 있는 주행봉이라고. 경치가 엄청 좋대. 근데 그 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산 정상에 무덤이 하나 있대. 같이 안 갈래?"

"무덤 옆에 가서 자고 오잔 말이야?"


"그렇지. 혼자는 무서워서 좀 그렇고,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해."


이런 대화를 두어 명과 나누어본 것 같다. 딱히 호응은 없었다. 굳이 산꼭대기까지 짐을 지고 올라가 하루밤 자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려운데, 거기에다 무덤까지 있다니 그럴 만도 하다.


다른 분의 블로그에 있는 주행봉 겨울 풍경. 가운데에 봉분 낮은 무덤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사진 출처는 https://kim22300.tistory.com/812


조망이 좋은데 백패커들에게 인기 없는 곳, 양립하기 어려운 두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장소를 나는 좋아한다. 경치가 좋은데 인기가 없으려면 접근이 어렵거나(즉 산행 시간이 길거나) 나무 데크 같은 인공의 편의시설이 없어야 한다.


백화산 주행봉은 그런 조건들이 잘 들어맞았다. 아니 지나치게 잘 맞았다. 무덤 옆에서 자고 싶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치가 압권(월간 산 21년 12월호)"이라고 하니 한번쯤 가 보고 싶었다.


도대체 산 꼭대기에 무덤은 왜 있는 것일까?


가끔 산에서 "이런 곳에 어떻게 무덤을 만들었지?" 싶은 묘를 만나곤 한다. 대부분 묘비도 없고 잡풀이 무성하다. 하긴 묘비라는 게 돌덩어리니 오히려 시신보다 옮기기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람들 다니는 길에 묘를 쓰는 건 민폐이니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닐테고, 성묘하러 무슨 큰 산 정상까지 등산화에 배낭에 비옷 갖추고 본격 등산을 가야 한다면 어떤 후손이 좋아하랴. 그나마 아들 손자면 몰라도 며느리는 또 무슨 죄로.... 그런 등등의 이유로 버려진 무덤이 되는 것이리라 추정한다.


그런 방치된 산꼭대기 무덤을 만나면 기분이 괜히 쓸쓸하고 어쩐지 으스스하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날. 산정에서 혼자 텐트를 치고 일몰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주행봉 정상에 누워 계신 이름 모를 그분이나 지금 여기 있는 나나 비슷한 걸 하고 있네,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주말에나 시간 내서 하는 걸 그 양반은 매일매일 하고 있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부러워해야 할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갑자기 그 분에게 동병상련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산꼭대기에 자발적으로 가신 건지 후손들에게 억지로 끌려가신 건지는 알 수 없어도, 경치 좋기로 소문난 봉우리를 독차지하고 누워 있다면 시신으로서 나름 괜찮은 삶(?)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니 무서움의 대상이던 주행봉 정상의 무덤이 돌연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8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동행할 사람 없이 반차를 내고 충북 영동군 황간면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황간IC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반야사를 향해 들어가는 길, 펼쳐지는 의외의 예쁜 풍경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넓고 넉넉하고 편안한 계곡이 있다니!


시간 압박에도 불구하고 잠시 차에서 내렸다. 찾아보니 석천 계곡이라고 한단다.



도로변에서 보는 석천.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백화산 정상인 한성봉이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출발한 것이 거의 오후 4시. 등산로 입구 안내판에 주행봉까지 2시간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몰은 7시 경이다. 해지기 전 일찌감치, 가급적 일몰 한시간 전에 도착하는 게 목표였는데 20kg 넘는 짐을 지고 얼마나 빨리 갈 수 있을까? 해가 진 후 어두컴컴한 봉우리에 랜턴 불빛에 의지해 올라갔는데 불빛 아래 스윽 드러나는 버려진 무덤.... 이런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주행봉(874m)에 이르는 길이 두 갈래인데 무엇에 홀린듯 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왼쪽 능선길을 택했다. 안내지도에 5분 차이라고 되어 있길래, 5분 정도면 경치가 더 좋은 쪽으로 가자고 결정했다. 그러고는 무서운 상황을 맞기 싫어서 해지기 전에 도착하려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갔다.



주행봉 직전 봉우리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 5시반 정도. 박배낭을 메고도 정상(?) 시간 비슷하거나 더 빠르게 올라왔다. 조금 안심이 된다. 역시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 무한한 능력을 왜 굳이 이런 식으로 발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등산객 안전도 좋지만 쇠난간을 무려 두 줄로 만든 건 너무 심한 것 아닐까? 인공구조물은 최소한이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주행봉은 멋진 봉우리다. 내려갔다 저 바위 오른쪽 어두운 부분을 통해 다시 올라가야 한다.



주행봉 도착. 아직 해는 한 시간 남았다. 길어져가는 그림자 속에 잡초 무성한 버려진 무덤이 쓸쓸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지 궁금했던 무덤 주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드렸다. 찾아와서 돌봐주는 후손도 없이 홀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외로울까.


뭐, 끊임없이 등산객들이 계속 다니니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다이니마 천으로 만든 텐트가 가볍다고 해서 하나 장만했는데, 무덤 옆에 쳐놓고 보니 어쩐지 장지에 치는 천막 비슷해 보여 기분이 이상하다.  


산 아래 가게에서 사 온 막걸리 한 잔을 이름모를 무덤 주인에게 드렸다. 그리고 괜히 밤에 꿈자리 사납게 이상한 거 하지 마시라는 부탁과 함께 한 잔 더 드렸다.  




주행봉 조망은 좋은데 일몰 방향은 나무로 막혀있다. 무덤을 감싸주는 부드러운 석양빛은 나무 틈으로만 살짜기.


곧 구름이 끼면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기분이 평온했다. 저분이나 나나 오늘밤은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니 딱히 부담이 되는 건 없었다. 차라리 무덤보다는 모기가 더 무서웠다.


누군가 꿈에 나타나서 "내 원수를 갚아주~" 하는 불상사 같은 것도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최근 몇 주일간 가장 깊은 숙면을 취했다. 땡큐 어르신~







안개가 끼더니, 해가 한참 올라간 후에야 걷혔다.


붉은 일출은 볼 수 없었지만, 장엄한 아침 풍경이 펼쳐졌다.



매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침마다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니. 나는 뉘신지 모르는 이 분에게 왜 자꾸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일까.


설악산 서북주능 어딘가 석양빛 아름다운 곳에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치기와 낭만 어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데 이 분은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으니 나보다 고수일 수도 있겠다. 물론 생전에 산을 싫어했는데 사후에 억지로 끌려온 걸 수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풀을 조금 뽑아 드렸다. 그리고 작별의 인사도 했다.




내 조상님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공손하게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왕 인사를 할 거면 예의를 다해야 할 것 같다.


너무 무덤 사진만 찍었나? 하다보니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원래는 무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망이 있어 오려던 산이었는데, 이젠 어쩐지 무덤 때문에 일부러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독사진도 찍고 혼자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토요일 저녁 약속이 있기에 백화산 정상까지 칼바위 능선길은 다음을 기약하며, 마지막으로 파노라마 사진을 한 장 찍고 발걸음을 돌렸다.



주행봉의 새벽을 다시 경험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백화산 종주는 반드시 할 것이니 그 때 주행봉에 다시 와야 한다.


지난 밤, 산정은 이미 가을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았다. 세상 누구보다 먼저 가을을 맞이할, 뉘신지 모르올 어르신께서도 다음에 뵐 때까지 사람 구경 재미나게 하면서 잘 지내시기를.



2023. 8. 28.



이 산행의 GPX는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10118/5939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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