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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Jan 03. 2024

백암산의 11월

23년 11월 경북 울진군 신선계곡 백암산


모처럼 맞은 회사 놀금, 어딘가 멀리 가고 싶었다. 11월 말엔 산행지를 정하기가 쉽지 않다.  국립공원은 닫았고, 산에 나뭇잎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이 온 것도 아니고.....


그러면 평소 멀어서 못 가는 곳이나 가자, 궁리하다 울진 백암온천으로 향했다. 울진의 덕구온천보다 훨씬 더 유명한 것은 물론이고 일찌기 1970년대부터 대규모 관광지로 개발된, 우리나라 3대 온천이라고도 하는 곳인데....



백암온천 관광 특구. 저 뒤가 백암산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 놀랍도록 썰렁한, 걸어다니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조용한 온천마을엔 격한 문장이 담긴 플래카드들만 찬 바람에 나부꼈다.


한화콘도가 백암온천에서 폐업하기로 결정했나보다. 코로나 이후 방문자가 급감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사람이 없긴 하다. 금요일이면 국립공원의 산꼭대기 대피소들도 예약이 불가능할만큼 사람이 많은데, 백암온천은 오후가 늦어가도록 오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관광단지 중앙 주차장 앞 밥집에 저녁 손님이 나 혼자다. 산에서 구워먹을 고기를 사러 하나로마트에 갔더니 수요가 없어서 그런지 냉동육 밖에 팔지 않는다.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11월 말의 날씨, 꽝꽝 언 삼겹살은 다음날 저녁 산꼭대기에서 꺼낼 때까지 녹지도 않았다.







백암산 정상 조망이 좋다고 하니 그곳에 텐트를 치는 것이 이번 산행의 목표인데, 그냥 짧게 올라가기는 시간도 남고 재미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나온,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신선계곡이라는 곳으로 찾아갔다.


아는 사람은 아는 유명한 계곡이라는데 신선계곡,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신선이 노니는 계곡이기에 신선계곡이라고 했겠지? 그거 참 상상력 빈약한, 영혼 없이 지은 이름이다. 중국집으로 치면 '중화반점'에 필적하는 심심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장르의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만 해도 무언가 그럴듯한 삽화가 떠오르는 비주얼적인 이름인데, '신선계곡'이라니.



신선계곡에는 심지어 '신선탕'도 있다.


선녀탕이면 아리따운 선녀들이 와서 날개옷을 바위틈에 숨기고 조용히 목욕을 할 것 같은데, 신선탕에는 수염 허연 할아버지들이 술 마셔서 불콰해진 얼굴로 다 벗고 철벅철벅 볼썽 사납게 돌아다닐 것만 같다. 경상북도라 모든 게 여자보단 남자 우선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나의 편견일까?


아니, 선녀는 젊고 아리따운 처녀이고 신선은 머리 허옇고 뱃살 늘어진 할아버지라는 상상이 드는 것이야말로 나의 편견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선 젊고 그림같이 예쁜 미남자들이 숲 속에 사는 신비로운 엘프족으로 나오던데....


용소. 뜨거웠던 가을 단풍은 물 속 가득 낙엽으로 남았다.


아무튼, 별 정보 없이 처음 접하는 신선계곡은 놀라울만큼 크고 길었다. 일년 중 가장 가문 시기인 11월 말인데도 꽤 넉넉한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갔고, 부지런히 걸어도 편도 세 시간이나 걸리는 긴 계곡이었다. 아무리 비수기라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는 것도 놀라운데, 이 산골 오지에 이렇게까지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는 건 더더욱 놀라웠다. 지나칠 정도로 잘 정비된 데크길엔 토요일인데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드는 점 하나. 곳곳에 데크길을 벗어나 하천트레킹, 그러니까 길 없이 계곡을 걷는 소위 '계곡치기'를 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한다. 데크길 중간중간 계곡으로 내려가는 입구도 친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뭐만 하면 입산금지, 샛길금지, 출입금지가 난무하는 우리나라 산에서 아주 작지만 이렇게 탐험과 모험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해주다니, 울진군 공무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뭐 이런 분위기의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다. 가물어서 물이 적어서 그렇지 여름엔 꽤 멋질 것 같다.


계곡 끝나는 곳까지 편도 세 시간. 그곳에서 백암산 정상까지 한 시간 반.


....이라고 쓰여 있다. 아침 9시에 주차장에서 출발했으니 아무리 박배낭이 무겁다 해도 넉넉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데크길을 타고 쏜살같이 걸었을 때의 이야기. 두 번에 걸쳐 계곡치기를 하며 천천히 갔더니 계곡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이미 오후 두 시다.


게다가 그 지점에서 지도를 잘못 읽었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지름길이라 생각해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괜히 진입했다가 한 20분 후 길을 잃었다. 낙엽이 수북히 덮인 구덩이를 땅인 줄 알고 밟았다가 고꾸라져 위아래가 뒤집힌 채로 머리부터 계곡물에 빠졌다. 전의를 상실하고 신선계곡 끝나는 합수곡까지 도로 후퇴.


큰일났다. 이러다가는 해 지기 전에 못 올라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곡 트래킹을 자제할 걸.


오늘이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 한다. 나뭇잎도 눈도 없는 11월 말의 별 특징없는 능선길에 본격적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길을 잃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곳곳에 낙엽 때문에 헤매게 되는 지점들이 많아 해가 지면 길을 찾을 자신이 없다. 힘이 들어도 쉴 수가 없다.


별 특징없는 능선길에 나무 그림자가 길어져 간다. 16시 22분. 정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오늘의 일몰은 17시 08분. 낮이 제일 짧은 동짓날이 일몰도 가장 빠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란다. 일몰은 12월 초가 일년 중 가장 빠르다고 한다. 오늘이 11월 25일이니 거의 그 때인 셈이다.


짐이 무거워서겠지만 아침부터 거의 8시간을 걸었다. 어쩐지, 사람들이 신선계곡-백암산 연계산행을 별로 안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일몰 20분 전. 땀범벅이 되어, 추위에 덜덜 떨며, 긴장해서 오그라든 마음으로, 느릿느릿 기진맥진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아,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해가 져가는 정상에 배낭을 내팽개치고




너무 추우니 얼른 텐트부터





사실 병원에 계신 외할머니의 생신이었다. 98번째 생일.


물론 나는 모르고 있었다. 어제밤에 혼자 온천하고 밥먹고 솔로 여행 기분을 내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내일이 할머니 생신이고 다음 생신까지 살아계실지 기약할 수가 없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않겠냐고.


격리병실에 계시기에 어차피 찾아갈 수는 없다. 병원에선 감염이 우려되어 꽃도 안 받는다고 한다. 뭐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는데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병원에 찾아가서 면회시켜달라고 부탁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건가. 이러고 산에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마음이 불편해서인가 잠에 깊이 들지 못했다. 바람도 엄청나게 불었다. 산 아래 마을이 영하 3도이니 여긴 영하 7-8도는 될 것이다. 아직 겨울을 맞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인지 너무너무 추웠다.


할머니, 그래도 happy birthday~!





백암산은 동해에 매우 가까이 붙어 있다. 그래서 올라오면서 일출을 기대했는데,



겨울이니 이 정도 보이지 여름이면 나뭇잎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듯하다. 날도 흐렸다.


그래도 200mm 최대한 당겨서 한 컷



반대쪽 조망은 트여있다. 해뜰녘의 서쪽.



하산길.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이 눈길 걷는 기분이다.


이번엔 온천 단지로 곧바로 내려가는 최단코스.


어제밤 하루 묵었던 숙소 방면 산길이 궁금했기에 중간에 살짝 샛길로 빠졌다. 길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불필요한 고생을 또 했다. 갑자기 산 속에 떡하니 무덤이 하나 나오더니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이쪽으로 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무덤. 저쪽으로 갔다가 아닌 것 같아 돌아오면 다시 무덤. 무덤 옆 무성한 잡목숲에 난데없이 기왓장이 잔뜩 쌓여 있다. 누가 무슨 집을 지으려고 했나? 무덤 옆에? 성황당? 아니면 지으려던 사람이 죽어서 여기에?



무덤 옆에 이런 병도 있다. 이게 어느 시대 소주병인지조차 모르겠다.


길을 잃고 무덤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서너번. 날도 흐린데 괜히 기분이 으스스해진다. 그래서 무덤에 꾸벅 인사 후 부탁을 했다. 저 좀 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신기하게 길이 보인다. 무덤에서 직진하면 뻔히 길이 나오는데 아까는 그게 왜 안 보였는지 모른다.


다시 돌아온 온천 관광지는 일요일이 되니 좀 활기차 보인다. 가족들도 많다. 다만 동네에 한두대 있는 택시가 멀리 나갔다길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신선계곡 입구까지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 시간을 걸었다.


다시 신선계곡 입구. 이틀 동안 심하게 걸었다.


체험해 보니 계곡 풍광은 멋진데 이름이 좀 더 멋드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주차장 앞 안내판을 잘 보니 명칭 유래가 있다. “이 진사(進士)라는 사람이 와서 보니 계곡의 아름다움이 신선이 놀던 곳과 같다 하여 신선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역시, 실명도 아닌 이 진사라는 익명의 외지인이 붙인 이름이란다.


하지만 저 안에서 노닐고 계실 신선님들에게 이름 따위 무엇이 중요할까. 다음에 여름에 오면 나도 술 한잔 얻어먹고 물에 들어가면 좋겠다. 물론 볼썽은 좀 사나울 지도 모르겠다.



(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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