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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댁 May 27. 2022

에쿠니 가오리 그리고 파친코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그녀들

 



 미노루는 심히 유쾌하고, 그리고 푸근한 기분이었다. 치즈는 무난하니까. 그 말이 가슴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미노루에게는 이런 일이 때로 있다. 별거 아닌 말이 불쑥 기분의 한 부분을 움켜 잡는다. 귀여운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귀엽고 쩨쩨하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치즈는 무난한 것일까. 냄새가 심하게 나는 치즈도 있고, 간단하게 먹으려면 풋콩이나 야채 스틱도 있는데. 센스도 별로 없다. 무난함을 선택하는 것은 겸허한 듯 보이지만 오만한 태도다. 완벽하지 않은가. 귀엽고 쩨쩨하고(미노루는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의미를 알 수 없고 센스가 별로 없는 것은 완벽하게 준코 자체다. 미노르는 이런 때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연애 감정은 전혀 아니지만, 호감인 것은 틀림없다. 하기야 스즈메라면 악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 헤어지기 전에 혹여 키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미노르는 스스로를 경계했다.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김난주 옮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언제나 '에쿠니 가오리'였다. 그녀를 설명하는 말 중 '청아한 문체'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고, 가끔 그녀의 관찰력과 표현력에 감동받아 한참을 그냥 머릿속에서 곱씹어보며 멍 때리고 있기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반짝반짝 빛나는'이고, 그 속의 주인공들은 내게 일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은 믿음과 친근함이 있다. 스무 살부터 온갖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모든 곳에서 그녀의 책을 읽었다. 그녀의 책은 나와 늘 함께였다. 그리고 어제 우연히 다시 펼친 그녀의 소설에서 내가 왜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는지 또 한 번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문단을 만났다.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인데, 이처럼 갑자기 불쑥 내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그럴 때 더없이 행복하다. 그때의 찌르르한 마음의 설렘과 살짝 간지러운 마음이 기분이 좋다. 그래서 어제부터 오며 가며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들춰보며 경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꽤나 감성적인 편이어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행동이나 말끝 하나에 상대방에게 반해버리는 일이 다반사인데, 우리 신랑의 경우에도 그랬다. 앞 테이블의 친구에게 술잔을 건네주며 양복 재킷의 앞 섭이 테이블로 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살짝 가리던 행동이나 운동화 끈을 빼버리고 캐주얼하게 신고 나온 남색 컨버스 운동화등이 마음에 들어 만나기 시작했다. 정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일들이고 순간의 감정인데, 에쿠니 가오리는 그 순간에 드는 수많은 감정들을 완벽하게 글로 풀어내는 재주를 갖고 있다. 특히 동사가 아닌 형용사로 그 사람의 상태나 기분 행동 등을 표현하는 데에 가히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럽고, 그래서 존경하며, 그래서 그녀의 책들은 나에게 늘 위안이 된다. 


 귀엽고 쩨쩨하다는 말이며, 무난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겸허한 듯 보이지만 오만한 태도라는 말이며, 난 늘 그녀의 통찰력에 압도되고 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소설을 이렇듯 완벽하게 아름다운 한글 소설로 번역해 주신 또 한 명의 능력자, 번역가 김난주 씨에게 경탄의 마음이 든다. 사실 번역본은 두 작가의 공동 작업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책이라도 번역본에 따라 책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난주 씨는 한국의 에쿠니 가오리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든다. 나는 일본어를 잘 알지 못해 그녀의 원작이 어떠한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아주 결이 비슷한 문장들의 원작일 거라고 상상한다. 거의 모든 에쿠니 가오리 소설을 김난주 씨가 번역했고, 그 모든 소설들은 하나같이 같은 무드를 풍긴다. 그리고 내겐 그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다.


 그래서 늘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1프로의 아쉬움이 있었다. 수많은 번역본들을 읽으며 늘 원서는 어떨까, 과연 이런 뉘앙스로 작가가 쓴 것일까 궁금함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아마 내가 통/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때론 내가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오는데, 그럴 때엔 앞 뒤의 문맥을 통해 대강 이런 뜻이겠거니 끼워 맞추기도 했다. 물론 나는 아마추어였고 책 출간 같은 공식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왕왕 벌어지는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문학은 가끔 난해하지 않은가. 그럴 때마다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들곤 했다. 번역하시는 분들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과, 과연 내가 읽은 번역본은 원작자의 뜻에 백 프로 일치할까?라는 의문. 그런 생각에 몇 년 전부터는 영문 소설은 원작으로 읽기 시작했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이 그 유명한 '파친코'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드디어 제2의 최애 소설가가 나타났구나 알았다. 


 


"You should not have seen him"

"It went well. He'll come to Yokohama next week. Mozasu will be so happy."

 Hansu told the driver to go. He listened to her talk about their meeting.


That evening, when Noa did not call her, she realized that she had not given him her home number in Yokohama. In the morning, Hansu phoned her. Noa had shot himself a few minutes after she'd left his office.


                                                                                             'Pachinko' 

                                                                                               Minjin Lee



  오늘 아침에 읽다가 내가 머리에 총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던 부분. 너무 놀라서 이후로 더 이상 읽지 못했다. 그냥 읽었던 문장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가 있었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아들의 심리와, 내 목숨보다 더 아들을 사랑하고 헌신하지만 자식의 선택을 존중하기보다 내 눈앞에 두고 싶어 하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마음들을 재미교포인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해 내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생부의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아쉬움 섞인 경고와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좋아하는 엄마의 상반된 모습을 단 몇 줄로 끌어낸다. 대화 한 마디에, 단어 하나에 많은 것을 담고 있고, 그냥 읽고 지나가다가도 후에야 그 말의 뜻을 곱씹게 하는 마력이 있다. 


 사실 요즈음 파친코를 읽으며 그 내용에 빠져서 글을 써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내용에 푹 빠져버리는 내 습관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지내기도 했고, 그녀의 재능에 주눅이 들어 내가 글을 쓴다는 게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제 우연히 에쿠니 가오리의 내 맘에 들어오는 문단을 만났고,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에서의 충격적인 전개로 잠시 내게 숨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하긴 뭐 내가 소설을 쓸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일상을 끄적거릴 일뿐인데, 프로페셔널 작가와 비교할 필요가 뭐가 있나,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그 김에 그녀들에게 감사함과 경의를 표해본다. 언젠가 내가 겪었던 감정일 듯한 상황을 세심하게 말로 풀어주는 에쿠니 가오리의 문장들에 나는 힐링을 받는다. 답답한 내 마음을 누가 알고 읽어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문득 생각날 때 그저 펼쳐볼 수 있는 책이 몇 권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짐 가방 두 개로 시작한 단출한 신혼살림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늘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함께였다. 비행기 짐은 100g도 허투루 쓸 수가 없는데 나는 무거운 그 책을 늘 끼고 다녀 부모님의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서 그 덕분에 타향살이를 잘 보듬으며 지낼 수 있었다. 몇 년 전 창고 수도관이 터져서 책 몇 권이 흠뻑 젖어버려 마음을 아프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늘 책장 한 칸은 그녀의 책들이 놓여있다. 내 마음의 안식처랄까. 이제 또 한 명의 작가가 늘어나서 너무 반가운 기분이다. 문득 우울하거나 지칠 때,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다른 곳으로 훌쩍 데려다주는 매개체가, 나에겐 그녀의 소설들이다.


빨간 장화 책은 왜 두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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