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 우리는 오만 호들갑을 떨고 있지
싱가포르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의 목표는 센토사 섬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은 밥이 먼저였다.
센토사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보 시티를 거쳐야 하는데, 이곳도 대형 쇼핑몰이 있어 먹거리와 구경할 거리가 가득하다. 특히 한식당이 잘 되어있어 가족 여행을 온 한국인들에게는 한식을 수혈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물론 한식당 외에도 다양한 맛집, 그리고 푸드코트도 잘 마련되어 있어기에 취향에 따라 음식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태국 음식을 먹기로 했다.
여행 일정 중에 방콕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마침 태국 음식점이 자리도 잘 마련되어 있고 가격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독특한 것은 파란색의 밥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맛은 파란 맛이 아니었다. 그냥 날라가는 밥맛. 그 위에 돼지고기 볶음이 올라가 있어서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맛은 맛있었다.
공심채 볶음도 골랐는데 위에 올라간 후레이크가 놀랄 만큼 딱딱해서 씹기가 불편했지만 역시나 맛은 있었고, 대동이가 시킨 씨푸드 볶음밥은 씨푸드가 거이 보이지 않았지만 예상 가능하듯 맛있는 맛이긴 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성공이지.'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하고 나니 목이 말라졌다.
비보 시티의 카페들은 신기하게 다들 식사를 같이 팔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음료만 시켜 앉아서 먹기 미안한 기분이 들어 좀처럼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카페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쉬는 것이 나을 뻔했네.'
어쨌든 카페를 찾아 방황했는데, 그러다 전날 마리나 베이에서 먹었던 헤이티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색다른 것을 도전해 보고 싶어 전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시켰던 것으로 기억되는 밀크티와 망고 그레이프 푸르트 사고(이렇게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라는 음료를 선택했는데 맛을 미리 설명해 드리자면 개망함이었다.
밀크티는 내가 알고 있던 밀크티와 묘하게 다른 맛이었고, 망고음료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기묘한 고소함이 느껴졌다.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미묘해서 익숙지가 않다'였다.
익숙하지 않음은 우리에게 어색한 불편함으로 다가오곤 한다. 언젠가 그 어색함에 익숙해지면 '진짜 맛'을 깨달을 수 있겠지. 물론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이었다.
센토사 섬은 관광객들에게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루지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다 선 배드에서 시원한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도 인기가 있는 곳이니 휴양이든 익스트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보길 바란다.
특히 아빠 머라이언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코로나 시국 동안 이 아빠 머라이언이 없어졌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자면 섬 전체를 리뉴얼 중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온 사방이 공사판인 혼돈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센토사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 근처에 앉아 누군가의 블로그를 통해 이 사실을 읽는 중이었다. 한 손에는 맛없는 헤이티를 들고.
"우리 오늘은 센토사 섬 가지 말자."
순간 내 입에서 마음의 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러자 대동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야기한다.
"나도 오늘은 별로였어."
쉬다 보니 더 쉬고 싶어 진다.
날이 너무 덥고 습해서 도저히 섬을 탐험하고 싶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는 도시숲을 모험해야 한다!'
길이 잘 닦여있고, 에어컨 바람이 가까운 곳에서 헤매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또 다른 쇼핑몰 거리, 오차드 로드로 떠나자!'
비보 시티에서 버스를 타면 오차드 로드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이번 싱가포르 여행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기도 했는데 2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여행 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걸어 다니자니 체력이 기적적인 속도로 닳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호강이 있을까? 심지어 우리는 매일 2만보씩 가뿐히 걷고 있으니, 평소 운동을 멀리하던 내 몸뚱이가 '왜 이래 갑자기?'라며 삐그덕 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행하는 기분은 물씬 나는데 몸은 편안하다.
극락이었다.
곧 오차드 로드에 도착했고, 다시 빌딩과 쇼핑몰 사이에서 우리는 방황을 시작했다.
'기억난다, 지난번에 여기서 사진 찍고 비가 와서 저기 피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차드 로드도 많이 변한 것이 없었다. 숭덩숭덩 아이스크림을 썰어 식빵 사이에 넣어 주는 아이스크림 할아버지까지..
자, 미션이다. 아주 난이도가 낮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곳에 오게 된다면 아이스크림 할아버지를 꼭 찾길!
마치 게임 속에 NPC 같은 존재감을 가지신 분인데, 비슷한 아이스크림 상인들이 여럿 있으니 사람들이 어디에 줄을 많이 서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어딜 가나 맛은 똑같지만.
주문은 먼저 빵, 그리고 아이스크림 종류를 선택하는 순서로 이루어진다. 그럼 할아버지가 아이스박스에서 네모난 아이스크림을 꺼내 칼로 숭덩 썰어 샌드위치처럼 빵으로 감싸 주신다.
내가 추천하는 것은 레인보우 무늬가 그려진 식빵. 아이스크림은 다 맛있으니 랜덤으로 정해도 된다.
여기 식빵은 참으로 쫀쫀하고 부드러운데 그게 참 매력이 있다. 특별한 맛은 아닌데 맛있다. 신기하에 나는 싱가포르 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딱히 없는데, 종종 이 아이스크림 빵만은 그리울 때가 있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먹고 싶어 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걸 먹기 위해 여길 왔나 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집에서 비슷하게 만들어 먹으면 비슷하게 맛이 나겠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비슷'할 뿐.
역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오리지널'을 따라갈 순 없다.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아이스크림 할아버지.
다음에 또 여행 올게요.
이 나라의 밤은 뜨겁다.
클라키 주변 맛집 도장 깨기를 하거나, 사테 거리에서 꼬치와 맥주를 한잔 곁들이거나, 혹은 마리나베이의 야경과 슈퍼트리쇼, 그리고 분수쇼를 즐기는 것도 추천.
그중에서 오늘의 저녁 일정은 분수쇼로 정했다.
시간을 잘 맞추면 슈퍼트리쇼 다음으로 연결해서 볼 수도 있지만, 시간 맞추기에 실패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나와 마리나 베이 앞쪽 분수쇼가 이루어지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우리와 같이 쇼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고, 뜨뜨 미지근한 바람이 그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변을 돌아보니 야경이 환상적이다.
'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주변을 채우고 있는 높은 빌딩들의 형광등은 사그라 들 줄을 모르는 듯이 찬란했다.
이곳에 있자니 갑자기 해운대 바다가 생각났다.
부산 해운대 야경은 그곳에 사는 실 거주자들이 만들어주는 장관인데, 이곳은 사무실 직원들의 노고가 깃든 장관이니..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들은 모두 일찍이 퇴근했으며, 이건 관광객들을 위한 선물로 치는 것이 내 심신의 안정을 주는 듯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곧 있으니 분수쇼가 시작됐다. 커다란 동상에 초록색 불빛이 쏘아지며, 마치 거대한 선인장같이 보이는 방망이를 중심으로 쇼가 펼쳐진다. 만 아래 설치된 호수에서 물이 공중으로 쏘아져 오른다. 그 물안개에 조명과 음악이 곁들여지자 커다란 워터 스크린 화면으로 한 편의 예술 영화가 상영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나도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그 장면을 소중히 담았다.
그 순간 물줄기가 더욱 높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동시에 앞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콜라보레이션 되어 물안개가 후두둑 인파 위로 떨어진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려왔지만, 곧 다시 분수쇼에 집중되며 조용해진다.
하지만 나와 대동이는 오만 호들갑을 다 떨며 뒤편으로 물러났다.
일종의 도망인 것이다. 생각보다 물을 많이 맞았으므로..
"만족스럽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나도."
사실 이 분수쇼는 싱가포르에 올 때마다 몇 번씩은 봤던 것이라 우리들에게는 그리 감흥이 크지 않은 이벤트였다. 오히려 전에는 매번 난간에 기대어 분수쇼만 지켜보았었는데, 이번엔 뒤로 물러서서 분수쇼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 그게 더 재밌었다.
모든 것은 각도의 차이다.
다른 각도에서 익숙한 것을 바라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멋진 경치보다도, 그 경치에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싱가포르, 참 멋진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