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기술의 발달과 엄마 찾아 삼만리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아메리카의 북에서 남으로 길게 내려가며 국경선을 마주하게 된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학창시절 사회과부도 지도책을 보며 남미에서 왜 칠레는 이렇게 기다란 땅을 받았을까 싶다. 마치 아프리카를 제국주의 세력들이 가로세로로 그냥 줄을 그은 것처럼 남미에도 제국의 정치가 개입했나? 싶었다.
실제로 와서 보면 여기에 정치가 개입될 영역은 크지 않았을듯 하다. 안데스 산맥으로 인해 그 산맥을 넘어가기 어려우니 산맥 서쪽으로 기다란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자연환경 그대로 눌러앉아 살면서 보니 칠레는 기다란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남미 대륙의 동쪽 광활한 대지를 차지한 큰 나라였다. 북반구의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오면 보에노스 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하는 풍요로운 멋진 신세계가 이곳이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지만 페루총독이 관리하도록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에겐 페루가 남미의 중심이었고 그 아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은 원주민들이 반독립적으로 살고있었다. 19세기초, 유럽에서 나폴레옹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각국의 왕정이 흔들리게되자, 남미에서도 마르틴 장군이 이끄는 독립운동이 커졌다.1810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페루ㅡ 칠레 연속으로 독립한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후에도 내부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가 팜파스 농업, 라플라스 강과 바다무역을 독점하여 부가 집중되는 반면, 나머지 주들은 빈곤하여 내부갈등이 극심해졌다. 19세기 후반까지 내전을 거친 후 187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수도가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본격적으로 국가모습을 갖추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시의 부는 냉장기술의 발명과 함께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유럽에서 18세기 말 에틸에테르를 이용한 증발냉각 기법으로 인공제빙에 성공한후, 1862년 스코틀랜드의 인쇄공이었던 제임스 해리슨(James Harrison)이 산업용 냉장고를 최초로 개발했다. 가정용 냉장고도 빠르게 보급하면서 냉장 기술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냉동 기술로 이어져 세계 각국의 고기와 과일 채소 무역이 활발해지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를 중심으로 광대한 팜파스 농경지가 있었는데, 여기서 곡물 뿐만 아니라 소 등 목축도 활발하였다. 냉장 냉동기술의 도입으로 멀리 남반구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것이다. 1870년대부터 1930년대 대공황까지가 아르헨티나 황금기였고 경제 부흥기였다.
혹자는 1950년대 이후 미소 냉전이 가능했던 것도 거대한 곡물과 목축 등 식량자원의 공급국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 뒤엔 아르헨티나. 소련 뒤엔 우크라이나가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남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원주민이 거의 없고 스페인 사람들, 백인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던 특징은 유럽의 하층민들을 유인하기에 충분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이 확대됬고, 660만명 정도가 배를 타고 이민왔다고 한다.
어릴때 책과 만화로 보며 눈물 콧물 다 흘렸던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의 배경이 바로 19세기에 유럽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집중적으로 노동이주를 한 시기라고 한다. 증기선의 증기를 뿜뿜 내뿜으며 허름한 옷가지를 챙긴 노동자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배 난간에 기대 바다로 향하는 모습이 바로 아르헨티나로 가는 것이었다.
몇달을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하면 닥지닥지 붙어있는 항구 주변 셋방에 살면서 하루하루 일자리를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지친 몸을 이끌로 항구 주변 창고방으로 들어와 몸을 맡긴다. 여기서 재즈가 나온것도 우연이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도시빈민층 노동자층의 불만이 커진다. 동시에 팜파스 농경지를 소유한 소수의 대농장 지주들의 부는 막대하게 커지고 부의 양극화가 극에 달한다.
노동자층의 불만, 봉기와 함께 갈등이 커지는 와중에 1930년대 군부가 통치하게 된다. 쿠데타는 아니고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통치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군인들의 통치도 기존 수구세력 중심으로 하다보니 부패가 심해져 1943년 영관급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하게된다. 이때 페론 대령이 노동장관이 되었다.
1946년 선거로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페론주의가 등장한다. 페론주의는 극좌. 극우로 정의하기 어렵고 국가적 온정주의. 사회정의. 노조 중시 정도 기조이다 . 페론은 선거 운동 때부터 방송 아나운서였던 에바 페론과 거의 한팀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이후 페론의 정치와 에바 페론의 죽음은 워낙 긴 스토리라 여기선 생략...
1976년 군부쿠데타 이후 이 군부정권이 자국민 대상으로 탄압과 고문을 자행하면서 6년간의 "더러운 전쟁"이 시작된다. 자국민 10만여명을 살해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유화. 국영기업 매각, 정치적으로는 영국령 포클랜드를 기습점령하면서 전쟁을 일으킨다. 대처에 패배하면서 아르헨티나는 급속히 쇠락,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경험은 잠깐이지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아르헨티나를 떠나며 생각에 잠긴다. 천혜의 자원을 갖고있고, 주변에 적도 없으며, 국민들도 인종갈등 없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순간에 나락으로 갈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