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사랑을 기대하며
3/10(월)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서
내가 쓰는 글 또한 진지하고 짙어져야 할 것이라는
책임을 느끼는 와중에 '계절리스트'라는 일기의
제목을 만들며 사실 제일 하고 싶은 말은
겨울과 봄 사이에 계절이 하나 더 있는 듯한
무채색과 지리멸렬한 단조로움이 싫어
불만을 글로 남기고 싶은 심산이었는데
지난 주말 오후엔
어느덧 온기를 품은 오렌지 빛이 지상으로 내리쬐고
연한 바람이 산의 나뭇가지를 부드럽게 흔드는 걸 보며겨울과 봄 사이에는 계절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춘'이라는 절기가 무색하게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고요한 적막이 가득 채우는 기간의 계절이 있고
환기시키려 열어둔 창문으로 불현듯 불어오는 바람이 동네 아이들 가벼운 웃음소리와 조잘거림처럼
고요한 일상의 작은 종소리, 은은한 꽃향기처럼 느껴져
‘정말 성큼, 불현듯, 코 앞에 와있었구나’ 라고
이 은은한 봄 기운을 알려주는 계절이 있다.
이 시기엔 아직 녹지 못한 눈과 새로 돋아나는 풀이
한 데 공존하는 광경이 연출된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니 기분이 사르르 좋아지잖아~
드디어 시집을 읽기에 정말 좋은 계절이네.
적막, 고요, 아련한 것들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도 없는 무르익은 사랑에 대한 기대와
달큰한 물기 가득한 복숭아를 베어 무는
계절의 무르익음을 기대하며
꺼내든 2025년 초봄의 시집은
유수연 시인의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제목도 어쩜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는지
나도 세월과 함께 차분해지고, 자연스럽게 온기로 남아 가는 과정의 잦아듦을 경험하고 싶어 지네 호호.
초봄의 맛
뭉큰하게 녹은 땅을 다니면 겨우 내 자란 자태를 드러낸 자주빛 냉이 잎이 보인다.
“엄마 여기! 이쪽에도 있어“ 하며 밭 곳곳에 성긴 자리를 만들고, 파낸 자리마다 촉촉한 흙내음이 희미하게 올라온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에 냉이를 씻어내면 흙이 씻겨나간 뿌리는 가느다란 실처럼 희고, 진한 녹색 잎사귀들은 물방울을 머금고 반짝인다.
주방 창을 통해 들어온 빛에 파란 소쿠리에 담겨진 손질된 냉이를 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봄의 한 조각이랄까. 생기로 가득 찬 광경.
올리브 오일, 앤쵸비, 페페론치노, 그리고 엄마표 된장으로 살살 파스타를 만들어 엄마와 나눠 먹는다.
달큰하고... 구수한 냉이 향이 초봄임을 알려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