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속이 안 좋아서 알프스산맥 어딘가에 토를 했다. 함께 간 지인분들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였다. 사실 알프스산맥이라고 하면 하얀 눈이 덮여 있는 그런 산을 상상했다. 내 발밑은 아니더라도 눈에 보이는 먼 산 정도는 눈에 덮여 있으리라... 하지만 내 상상과는 다른 초록색 산이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사람의 발 뒤꿈치만 보면서 오르막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알프스산맥이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비가 많이 왔다. 아이와 나는 비옷을 꺼내 입었다. 아이는 한번 토를 하고 나니 머리가 가볍다고 , 산길을 날아다녔다.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 얼마쯤 올라왔을까? 이 산에 정상은 있을까? 큰 비옷 때문인지, 아니면 내 마음 때문인지, 몸이 물에 젖은 솜방망이가 된 것 같았었다. 나는 울퉁불퉁한 산길을 오르는 게 힘들었다. 함께 출발한 분들은 나이도 많으신데 얼마나 힘들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젊은 나보다도 더 잘 올라갔다. 함께 간 분들의 평균 연령은 70대 초반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독일에 넘어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고 수십 년을 이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온 인생처럼 오로지 자신이 걸어야 할 길만 보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몇 분은 다리가 불편하신지,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분들은 우리보다 더 베테랑이었다.
산은 오른 지 1시간 반쯤 되었을 때, 함께 가신 지인분 중 한 분이 말했다. “이제 곧 탁 트인 시야가 펼쳐질 거예요.” 그분이 말한 [곧]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봤다. 사전에 의하면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지체 없이)라고, 해석되어 있었다. 어쩜 이토록 찰떡같은 단어가 있는지. 곧 내 눈앞에 보고도 믿기 힘든 웅장한 산이 보였다. 다시 말하면 바로 앞에 보이는 산부터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 자기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다. 산은 살아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물, 햇빛, 공기, 바람, 식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 생동감이 사진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눈 덮인 산은 아니지만 초록색 산에 걸쳐진 낮은 구름부터 계속 초록색 들판은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내 머릿속에 여러 장의 사진과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자연이라는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구나. 작아지는 내 존재에 미안할 정도로 나 자신이 저 산 아래 보이는 집처럼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힘들다는 것을 알고 출발했지만, 힘들어서 신랑에게 툴툴거려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 올라갈 것 같았던 마음이 또 오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는 데까지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모름지기 산을 오르는 것은 힘든 것이 당연했다. 힘들다는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산을 올랐다면, 그 산을 오르는 과정이 더 즐거웠을 텐데, 후회됐다.
후회를 뒤로 하고 우린 쉬어가는 쉼터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세모 지붕을 가진 통나무집에 집 둘레에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울타리 안 마당에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추가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지붕 아래 긴 벤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우리 모두 비에 젖지 않은 지붕 아래 벤치와 일렬로 나란히 모두 앉았다. 포장해 온 프리첼과, 삶은 달걀을 꺼냈다. 함께 가신 분들도 포장해 온 음식을 꺼내어 서로 나눠 먹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이곳은 산에서 소를 키우면서 지내는 독일 가족의 터전이기도 했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통나무집 부부는 아주 친절했다. 맥주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팔았다. 알프스 하이디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이곳에 살 것 같았다. 난 알프스 하이디 책을 항상 상상하며 읽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집과 소녀 하이디와 친구들이 뛰어놀던 잔디밭 말이다.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 믿기 어려울 만큼 책 속 풍경과 닮아 있었다. 신랑은 들어가서 맥주를 한 병 사서 나왔다. 우리 부부는 풍경을 안주 삼아 벌컥벌컥 나눠 마셨다. 다리도 아팠고 두통도 있었지만, 맥주 한 모금으로 아픈 곳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파란 하늘엔 하얀색 구름이 떠다녔고 비가 와서 약간의 안개와 이슬을 촉촉하게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 순간 목구멍으로 타고 내려오는 따끔한 느낌의 맥주와 코로 숨을 내뱉을 때 진한 맥주의 향이 풍겨 나왔다. 순간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산에는 방목하는 소가 여기저기 풀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소들이 움직일 때마다 ‘땡그랑‘,’땡그랑' 종소리가 났다. 종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나무집은 작지 않지만, 산 중턱에 자리 잡아서인지 아주 작아 보였다. 산이 높아 통나무집이 구름 위 비가 내리는 경계에서 벗어난 듯 신기하게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의 목표 지점은 여기까지였지만 매주 트레킹을 하러 다니시는 이분들 또한 오늘 같은 풍경과 날씨는 처음이라 하셨다. 비가 왔다가 해가 났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멈췄다. 그래서 우린 정상까지 올라가자고 마음먹었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지대가 높아서 펼쳐진 대 자연을 보면서 걸을 수 있었다. 정상에는 더 큰 자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