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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영 Mar 26. 2024

115. 개나리가 갑자기 폈다.


10번째 당직, 3일에 한번 당직이니 이제 한 달이 지난 거다.


토요일 아침 집에서 나와 하루만을 병원에서 잤을 뿐인데 당직 후 일요일, 집에 돌아가는 길은 낯설다. 불과 하루 만인데 계절은 완벽한 봄으로 바뀌었다.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세상의 신념, 명분, 그리고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장 앞에 떨어진 것은 3일에 한 번 꼴로 분만장의 밤을 지키는 '관계'의 일이었다.


병원에서 자야했던 2월의 어느 첫 당직 날,

당장 앞에 떨어진  인턴으로서의 일, 전공의 저년차와 고년차의 일, 그리고 집도의 교수로서의 일을 혼자 그것도 한꺼번에 해야 하는 상황에 던져진 나는 병원이 높게 쌓아 올린 전산화라는 효율 시스템 속에서 좌절할 수 에 없었다. 첫날은 전공의 시절 쓰던 종이 차트가 너무 그리웠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니 전공의 시절 밑줄친 종이 동의서만 받아 봤던 나도 이제 은행원처럼 '동의서 전용 탭'을 들고 형광펜글쓰기 펜의 기능을 자유자재로 전환시키는데 익숙해져 간다.


밤에는 병동과 분만장 간호사들에게 걸려오는 전화 받기를 몇 번 반복하며 잠을 깨며 육체는 극기훈련을 한다. 원래  집에서는 머리를 기댈 곳만 있으5분 안에 잠에 빠져드는 나는 막상 병원 당직실 침대에서는 자꾸 뒤척인다.


생각해보면 늘 봄은 힘들었다.

33년 전 본과 1학년 해부학 실습도 개나리가 피는 봄에 시작되었다. 교정에는 라일락 향기가 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어둡고 약간 습한 해부실습실에는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가 있었을 뿐이다.

95년 3월, 인턴을 시작했을 때는 파카를 입고 나와서 한 달 만에 집에 돌아가려니 이미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초보 의사로서 한 달을 소아흉부외과에서 어렵게 적응을 했는데 또 다른 과로 이동하는 병원 엘리베이터에서는 만성 질환 환자들의 냄새, 병원 소독약의 냄새 만이 기억에 남는다.

4년전 갑자기 시작된 코로나도 3월에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큰 애가 코로나 진단을 받으며 얼떨결에 온 가족이 2주 격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새벽 5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몰래  밖으로 나갔고 숨을 한껏 들이쉬며 익숙했던 새벽 공기를 낯설게 느끼며 겨우 동네 한 바퀴를 걸었다.   


생각해보면 매일 아침에 집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아니 하루는 24시간이기에 이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제는 분명히 개나리가 없었는데 밤 동안 병원 당직을 서는 동안 개나리가 몰래 피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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