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대중교통 중 지하철과 버스를 선택하라고 하면 환승을 하더라도 지하철을 선택했다. 버스의 투박한 승차감이 싫었고, 멈췄다 섰다가 하는 교통체증이 싫었다. 그에 반해 지하철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이 있지만 한 번에 유려하게 이동을 할 수 있고,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어서 지하철을 선호한다.
그래서 뉴욕에서도 주된 이동수단은 지하철이었다. 한국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취향이 반영되었다기보다는 뉴욕의 버스가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선 버스 노선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네이버 지도나 버스 어플같이 버스 노선과 정류장들이 상세하게 나와있지 않았다. 구글 지도가 안내해주는 길을 보면 어떤 버스를 이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스에서는 우리나라처럼 현금을 거슬러주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하차할 때 직접 문을 열고 내려야 하는 시스템이 너무 어색했다.
루이스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Sunnyside는 보라색의 Line 7 노선이 있었다. 역 이름은 46 St-Bliss역이었는데, 게스트하우스와 가까워서 걸어서 금방 갈 수 있었다. 지하철역은 자기 부상 열차처럼 고가 위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첫 장면의 배경처럼 생겼는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지하철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된다. Line 7 노선은 퀴즈에서 맨해튼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고가 위를 달리는데 창밖으로 퀸즈 Queens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창밖에 번쩍번쩍하는 전기 스파크를 보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뉴욕의 지하철은 운영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상당히 낡았고,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았다. 종종 외관에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는 열차를 보곤 했는데 그 모습 그대로 운영을 하는 걸 보면서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점이 24시간 운영한다는 것이었는데, 낮에 타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과연 밤에 타면 안전할까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뉴욕의 지하철은 1905년에 최초로 개통이 되었고 7호선도 1915년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근현대사 유물과 같은 것이었다. 뉴욕에 지하철이 들어올 때 우린 일제강점기였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성장을 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지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지하철처럼 제대로 된 설계로 만들어지지 않다 보니 곳곳에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환승을 할 때 특히 힘들었다. 특히 Court Square역이 가장 복잡한 걸로 기억하는데, 3개 노선을 환승할 수 있는 역이었다. 3개의 노선이 각층별로 있었고, 상행선과 하행선 별로 타는 플랫폼도 달랐다. 처음 이 역에서 환승을 했을 때 엄청 헤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맨해튼으로 출근(?) 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날은 보라색 7호선에서 다른 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Court Square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원하는 플랫폼으로 이동하여 멍하니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서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접근해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깜짝 놀랐다. 나를 부른 사람을 보니 20대 초중반의 한국인 남자였다. 그의 표정은 꽤 애를 먹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마치 내가 이 역을 처음 왔을 때 지었던 표정 같았다. 나의 예상대로 그도 환승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가 플랫폼에 혼자 있던 나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마침 그가 가려는 목적지에 가려면 나와 같은 지하철을 타면 되었다. 그래서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그 친구의 이름은 현수였고, 보스턴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물어보진 않았지만 확실히 나보다는 어려 보였다. 그동안 보스턴에만 머무르며 살고 있었다고 했다. 며칠 전에 친구가 뉴욕을 놀러 왔다기에 친구를 만나러 뉴욕에 온 것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고생을 하다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도 아직 뉴욕이 낯선 여행자 처지인데 뉴요커처럼 주제넘게 뉴욕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지하철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랑 어떻게 놀 거냐고 묻자 현수는 친구들과 서클이라는 한인 클럽에 놀러 갈 것이라고 했다. 클럽이라니. 뉴욕에 있으면서 전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장소였다. 미국의 클럽이라니... 너무 궁금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흥미로운 모임이 있으면 가도 되냐고 항상 물어보는 편이었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모임인데 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그 모임에 눈치 없이 끼곤 했다. 그런데 현수의 모임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겁 없는 나였지만 여긴 미국이었고,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면 대응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속마음을 알아챈 걸까?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나에게 현수는 나보고 서클에 놀러 오라는 말을 했다. 올 것이 왔다가 오호! 올 것이 왔다. 나는 주저 없이 알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흥분(?)되는 약속을 하고 지하철에서 헤어졌는데 무언가 허전했다. 아차! 우린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다. 역시 인사차로 얘기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먼저 오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정했다. 오늘 저녁 현수의 초대에 응하기로. 오늘 저녁 일정은 서클에 참석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