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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온 Feb 09. 2023

쇼호스트로 입사했는데, 화장품 마케터가 되었다.

입사 2주 내에 90% 이상이 퇴사하는 회사.



정규직

입사




2015년. 지금의 나였다면 절대 없었을 타협이었다. 대학교 졸업한 후, 쇼호스트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프리랜서 리포터와 사내 방송 아나운서를 병행하며 스펙을 쌓아나갔다. 자잘하고, 큰 방송들을 해오며 27살이 되었다. 그때의 내가 바라본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는 많아 보였고, 불안해 보였다. 몇 푼 되지 않는 페이와 불규칙한 방송 생활로 서울 살이를 한다는 게 너무 어려웠다.


더군다나 단순한 방송 경력만으로는 쇼호스트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 한샘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쇼호스트 아카데미의 한 학생이 대형 홈쇼핑 회사의 가구 부문 쇼호스트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장품(이미용) 부문 쇼호스트가 되고 싶으니, 화장품 회사에 가서 경력을 쌓아야겠다.'




"CJ오쇼핑에 출연할

화장품 게스트를 모집합니다."




아카데미 게시판에 채용 공고가 떴다. 마침 홈쇼핑에 출연할 회사 정규직의 게스트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게스트란 홈쇼핑에 회사 소속으로 출연하여 쇼호스트처럼 상품을 설명하는 사람을 말한다.



알고 보니 그 회사는 강남 한복판에 있는 국내와 해외에서 Top으로 잘 알려진 성형외과, 피부과가 만든 화장품 회사였다. 그때 당시 화장품 업계에서는 코스메슈티컬(Cosmeceutical: 화장품과 의약품의 합성어) 화장품이 유행했던 때라 병원과 제약회사에서는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하여 승승장구하는 시기였다.



주저할 틈도 없이 면접을 보러 갔다. 홈쇼핑에 론칭을 앞두고 있는 브랜드였던지라 면접 또한 매우 홈쇼핑스러웠다. 그 회사의 화장품을 홈쇼핑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처럼 PT를 하는 일이었고, 평소 해왔던 PT의 실력대로 면접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 그렇게 그 회사는 나의 첫 정규직 회사가 되었다.   




화장품 쇼호스트가 아닌

화장품 BM이 되었다.




병원의 규모와 다르게 화장품 회사는 스타트업 정도였다. 홈쇼핑에 출연하는 쇼호스트의 직무로 내가 뽑혔지만 정작 홈쇼핑 측에서는 소속 쇼호스트만으로 충분하다며 게스트 출연에 거절의사를 보였다. 그래도 화장품 회사에서 경력을 쌓기로 마음먹은 나는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일을 찾아서라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입사하자마자 병원에 화장품을 배송하는 일, 병원 직원들과 의사들에게 화장품을 교육을 하는 것, 시장 조사, 유튜브를 기획하고, 출연하는 일, 제안서를 만드는 일, 모든 미팅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 등 없는 일들도 만들어서 해내어 갔다. 다행인 건 빠르게 일처리를 하는 성격 덕분이었는지 많은 알바를 하며 다져온 센스 덕분이었는지 상사들 사이에서 나의 평은 꽤나 좋았다.



순수했던 그때의 나는 몰랐다. 일을 잘한다는 칭찬은 앞으로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길 것이라는 의미임을.  



하루는 오프라인팀의 K과장이 나를 불렀다.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론칭을 할 예정인데, 기존 상품을 이마트 트레이더스 타깃에 맞게 상품 기획과 마케팅 계획을 작성해서 오라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화장품을 기획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기획이라니.


나는 그날부터 마케터이자 BM (브랜드 매니저: 상품 기획, 개발, 시장 조사, 마케팅 전략, 채널 전략 및 운영, 관리 등 상품의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직무)이 되어야만 했다.



그 당시 상품 기획팀의 직원들이 공석으로 있던 상황이라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냥 부딪히자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해왔던 시장 조사와 미팅 때 받아온 제조사의 자료들을 참조해 트레이더스 채널에 맞는 튜브형의 재생크림(의약외품)을 기획했다.


그 당시 트레이더스에도 기존 화장품들은 많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재생'이라는 단어를 화장품에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때마침 피부 전문 기관에서 만든 화장품이라는 콘셉트로 피부 시술 후 노란 연고통에 담아주는 크림이라는 마케팅 콘셉트를 잡아 기획서를 작성했다. 사실 무언의 자신감이 있었다. 원래 화장품을 좋아했던 나는 우리 제품만한 콘셉트를 가진 화장품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연고형 스타일의 튜브로 구성을 기획하여 트레이더스 입점을 위한 제안서를 완성했다.



바이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준비한 내용에 진심을 담아 제안서 한 장 한 장을 PT 했다. 그 노력이 통한 건지, 무식한 열정이 먹혔던 건지 유명하지도 않았던 내 브랜드가 트레이더스 입점에 성공을 따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나는 사수없는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누군가에게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들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의 오프로드 길은 20대 초반에 다 달린 줄 알았는데,

그때가 또다른 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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