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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온 Feb 20. 2023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어"는 협박이 될 수 있나요?

K과장의 횡포.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어

너.



결국 그렇게 두서없이 많은 일들이 내게 떨어졌다. 상품을 기획하는 일, 마케팅 전략을 짜는 일, 판촉물을 만드는 일, 블로그 마케팅을 하는 일, 홍보 기사를 내는 일, 전국에 이마트 트레이더스의 점포의 현장을 직접 돌며 판매사원들의 교육을 하는 일 또한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하루는 이마트 트레이더스 일산점에 판매 사원이 출근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K과장은 나에게 그 매장에 나가 직접 판매를 하라는 지시를 했다. 늘 나의 의중 따위는 묵살한 채 지시만 내리는 타입이라 참고 참았던 터였다.


다른 방법이 없겠냐는 내 말에, K과장은 조용히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K과장  "너 지금 되게 애매한 포지션인 거 알지?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어, 너."



나       "네?"



K과장   "아니, 너 홈쇼핑하려고 입사했는데, 지금 홈쇼핑 방송 못하잖아.

           굳이 네가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지."




지금 생각해 보면 '과장님 이 무슨 x소리세요!'라며 노발대발하고 싶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사회 물이 묻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의 신입일 뿐이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내가 회사에서 해왔던 일, 그리고 오프라인에 입점시키기 위해서 해왔던 업무들은 그럼 회사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을 했던 거였나. K과장은 말을 이어갔다.




K과장   "아니 내가 너 자리 매김시켜주려고 이러는 거야. 오프라인 매출은 앞으로 커질 텐데,

            회사에서 네가 필요 없다고 해도, 내가 꼭 필요한 직원이라고 어필하면 되거든."



나         "..."



K과장   "내일 한 번만 일산점 가서 판매 좀 하고 와. 매출 잘 내면 다시는 안 내보낼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회사가 고작 사회 초년생 자리를 빼라 마라 할 일인가. 어리다는 이유, 순수하다는 걸 이용해 매번 협박으로 장난질을 하던 상사였다.

목적은 그냥 오프라인 매장에 판매사원 자리를 내가 채우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화가 나고, 오기가 생겼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하.. 순위권에도 못 드는 매출 부진 매장을 가서 어떻게 판매를 하라는 말이야.'





그래,

나 판매왕이었어.




그냥 해야만 했다.


그날 매장의 오전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나는 그곳에서 미쳐있었다. 점심시간도 손님을 놓칠까 아까워 김밥 반 줄을 급하게 먹고는, 휴식시간 한 번 갖지 않고 판매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내가 판매왕이었다 이거야. 보여주자!'




그때 당시 내가 맡은 상품의 진열 위치는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쇼핑하는 동선이 아닌 목적성을 가지고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보이는 위치였다. 상품을 홍보하고, 판매하기 매우 불리했다.


나는 무작정 테스터 제품들을 들고, 사람들이 들어오는 입구의 중간쯤 서있었다. 쇼핑을 이제 막 시작하려고 동선을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대학교 때 이마트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친절한 인사로 고객들에게 무리 없이 다가섰다. 무작정 "재생크림 발라보세요."라는 말로 고객의 손등에 화장품의 내용물을 겁 없이 올렸다.


그런데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고객들이 한 가지 행동을 똑같이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손등에 올려진 내용물의 냄새를 먼저 맡는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우리 제품은 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차라리 무향인 게 더 좋을 법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고객들이 냄새를 맡으면 곧바로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   "어우~ 향이 진짜 별로죠?!"




대부분의 판매사원들이었다면 아마 향을 맡는 고객의 행동을 무시하거나 향이 좋다고 우기거나 향이 안 좋은 편이 아니라는 말로 시작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대놓고 단점부터 고객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그랬더니 100이면 100, 모든 고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우 냄새가 왜 그래요?", 혹은 "네 그렇네요."라는 대답을 했다.


동조의 표시였다.




나   "그게 재생 연고에 들어가는 약초 냄새예요. 재생 크림이거든요,

       근데 일반 화장품은 재생크림이라는 말을 못써요."




대학 시절, 오리털 이불을 판매할 때처럼, 옷을 판매할 때처럼, 가판대에서 과일을 판매할 때처럼 특유의 사교성은 있되 안 사도 크게 상관은 없어라는 자신감으로 무장하며 고객의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할 정도로만 접근했다.



'그래도 판매왕이었으니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이후는 고객들은 대부분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객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우리 제품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몰고 왔다.



그리고 본사에서 직접 나와 판매하고 있다는 화가 나는 사실을 고객들에겐 특별함으로 내세우며 내 제품 내가 진심을 다해 판매를 하니 믿고 사가라는 신뢰성까지 더했다.



성공률을 98%에 가까웠다. 말을 건네는 사람들마다 상품을 집어갔다.



카트마다 내 상품을 들고나가는 모습을 본 다른 업체의 판매사원들은 도대체 무엇을 판매하는지 궁금해하며 나를 구경하러 오기까지 했다. 나중엔 마트의 화장품 담당 직원까지 사무실에서 매장으로 나와 왜 이렇게 잘 파시냐며 내게 물어보고 가기까지 했다.



다음 날, K과장의 문자가 왔다.




"너 대박이다."




하루 3~5개만 팔렸던 그 점포의 상품이 내가 다녀간 날 70여 개가 넘게 팔려, 전국 매장 매출 1등을 찍었다.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고, 그 소리는 자연스레 대표님 귀까지 들어갔다.


그 후로도 부당한 지시를 한 K과장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나를 자신의 직속 부하 직원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렇게 또 다른 지시가 내려졌다.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들어갈 후속 제품 기획해 와."




그렇게 나의 직무는 명백한 Brand manager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 자신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판매하거나 설명하는 걸 남들보다 잘했다는 걸. 만일 단순한 오기로만 했었다면 어떻게든 악착같이 팔긴 했겠지만 저만큼의 큰 성과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모든 시간을 정신 팔린 듯이 쓰지 못했을 일이다.


누구에게나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작년 말부터 나에 대한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 과거에서부터의 나를 생각하며 써 내려간 글에서 놓치고 있었던 나를 참 많이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매 해 공통적으로 내가 하는 일, 좋아했던 일..

내가 무엇을 했을 때, 나의 시간과 나의 잠, 혹은 식사 시간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하고자 했는지. 단순히 회사의 업무나 공부를 벗어난 행위 말이다.


무언가를 조립하느라 밤을 새웠던 일, 무대에 서는 게 좋아 장기자랑을 몇 날며칠을 준비해도 행복했던 일, 누군가의 고민과 이야기를 들어줄 땐 기꺼이 나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일 등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하며 행복감을 느꼈던 기억들이 분명 나의 과거 속에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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