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림온 Feb 20. 2023

700명의 여자가 다니는 회사.

함부로 기에 눌리지 마세요.





함부로 기에

눌리지 마세요.




나의 첫 회사였던 화장품 회사는 생각보다 큰 규모의 회사였다. 강남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기업과 합작해 세계 최대 규모의 성형외과 분점이 중국 현지에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 가장 놀라운 건 강남 본점의 700여 명의 직원들 중 98%는 여자였다는 거였다.


입사하자마자 나의 상사였던 여자 차장은 나를 회의실에 불렀다.

보통 회사에 대한 첫 이야기를 할 때, 회사에 대한 소개, 건물 위치 등 대외적인 회사의 모습들 먼저 소개하기 마련인데, 여자차장이 다짜고짜 내게 처음 건넸던 그 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함부로 기에 눌리지 마세요. 여자들이 많아서 말이 많은 곳이에요. 항상 말 조심하세요. "





이틀 뒤,

직원들 앞에서 화장품 교육 해 봐.




입사하자마자 처음 맡은 나의 정식 임무였다. 당장 그 회사의 화장품 브랜드가 무엇인지, 개수가 얼마나 있는지 파악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입사 후 이틀 뒤에 화장품을 교육하라니...


매일 아침 9시는 병원 직원들이 아침 조회를 하는 시간이었다. 화장품 회사였지만 병원이 모회사였던지라 모든 시스템이 병원에 맞춰져 있었다. 입사 인사도 하지 않은 내가 다짜고짜 수많은 직원들 앞에서 화장품 교육을 해야 하다니, 부담감이 컸다. 그리곤 계속 맴도는 그 말.



'함부로 기에 눌리지 마세요.'



에라 모르겠다. 기에 눌리고 말고, 그냥 내 것만 하자.





잘하는 걸 잘하는 건

나의 특기.




첫 교육의 날,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성형외과 로비에 직원 80여 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인원이 많아 수술팀, 상담팀, 회복실팀, 영상팀, 법무팀, 해외사업부팀, 코디팀등 다 나누어서 교육을 해야 했다.



직원들 앞에 처음 서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희한한 게, 왜 그렇게들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지. 하나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마치 '처음 왔니?',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그래, 한번 해 봐.'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실수를 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였다.



사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떨렸지만 그렇지 않은 척, 교육을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기에 눌리지 않고, 교육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잘하는 걸로 잘하는 건 나의 특기였다. 아니 어쩌면 그건 자존심이자 경쟁심이었던 것 같다. 못하는 건 꼴등을 해도 전혀 상관없지만 내가 잘하는 건 무조건 1등을 하거나 누가 봐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스스로가 정해놓은 나만의 기준이었다. 그 기준을 달성하는데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 넣는 건 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방송 생활을 해봤고, 스피치도 꽤나 잘하는 편이니 그걸 활용하면 되지 않겠나. 기에 눌리지 않으려면 상대를 내 기운에 빠져들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 나 비록 쇼호스트는 안 됐어도 쇼호스트 아카데미에서 1등 했던 사람이라 이거야.



홈쇼핑 방식으로 화장품 교육의 PT를 구성했다.



1.  위협소구.

2. 이 화장품이 기획된 이유.

3. 이 화장품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 기술력.

4. 핵심 성분 스토리 텔링.

5. 근거를 대 줄 임상 효과.

6. 실제 사용한 나의 후기.



느껴졌다. 사람들이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엔 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보는 듯한 직원들, 휴대폰만 바라보던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희열이 느껴졌다.


교육이 끝나고 나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아, 또 하고 싶다.'




살면서 무언가를 하면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게임이나 유흥이 아닌

'또 하고 싶은 일.'




첫 교육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대표가 나를 호출했다. 그 회사의 2인자라 불렸던 그녀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관리를 잘한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표  "어, 오늘 교육한 친구가 본인이야?"


     "아 네."


대표  "교육을 엄청 잘한다더라?!"


     "감사합니다."


대표  "그래, 수고해."



짧은 인사와 함께 대표실을 빠져나오는데, 같이 있던 여자 차장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합격했네."



실제로 내가 교육을 시작한 이래로 사내 직원들의 화장품 구매량과 병원 내 고객들의 화장품 판매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보고서들을 전달받았다.


내가 잘하는 일을 정말 잘한 순간이었다.



나의 첫 회사는 입사 후 2주 안에 대부분이 퇴사한다고 악명이 높았던 회사이자 평균 근속 개월 수가 2~3개월 밖에 못 미치는 회사였다. 하지만 나는 마의 2주를 넘기는 첫 미션을 수행해 냈다.




과거는 '지금의 나'이다. 모든 지나온 시간들은 비참하고,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할 수 있게 해 준 이유는 그것을 달성했던 경험들이 내 자신감의 근거가 되어준다. 어린 나이에 끝도 없던 아르바이트 생활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쉽게 기죽지 않는 내가 되어주고, 쇼호스트 아카데미에서 보냈던 2년간의 생활은 회사에서 대체할 수 없이 교육을 잘하는 직원이 되게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마저, 그저 재미로만 즐겼다고 생각했던 TV를 보고 있는 나도,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시간도, 그저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던 그 시간들조차도.


지나온 모든 시간들은 뭐든 결코 무의미한 게 없었다.

이전 04화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어"는 협박이 될 수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