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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Oct 17. 2023

가을 아침

경상도 출신인 아내와 같이 살면서 여러가지를 배우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부산어 이다. 단조롭고, 미지근한 서울말과 달리 그 표현이 참 직접적이고, 다채로우면서 입에 짝짝 달라붙는 말이 많다. 보통 대화를 하다가 아내가 어떤 단어를 이야기 하고, 그 말을 내가 알아 듣지 못하면 아내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준다. 그리고 나서 내가 보통 그 느낌을 살려서 한번 그 단어를 읊어보는데, 부산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과 목소리와 말투로 어색하게 내 뱉는 그 말이 그리도 우스운지 한바탕 깔깔 웃으며 대화가 끝이 난다.


"꺼주리 하다"


아침에 늦잠 푹 자고 일어나, 머리에 까치집을 얹고서, 늘어진 추리닝을 입고, 벅벅 몸을 긁어대며, 하품을 쩍 하는 우리 부자를 보며 그 말을 하고는 한참 웃었다. 보통 같은 상황속에서 새로운 말을 듣기때문에 대충 어떤 뜻 인지는 충분히 유추해 낼 수는 있는데, 무엇보다 그 억양이 아주 재미있었다. 뭔가 땅으로 꺼질듯한 낮은 저음으로 내려가서는 "리" 에서 한 3박자 끌다가 다소 한심하다는 듯이 "하다" 라고 툭 던지는 그 말투와 표정은 표준어라면 표현해 낼 수 없는 수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었다.  수척하다, 눈이 쾽하다, 피곤해 보인다는 말로는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 애정어린 핀잔의 장난스러운 표현. 그러고 보니 어머니도 비슷한 표현을 하셨던것 같다.


"눈이 때꾼하다"


떼끈하다.. 라고 들었는데, 찾아보니 꾼하다가 맞는 표현이고, 이건 표준말 이라고 한다. 눈이 쑥 들어가고 생기가 없다. 상황은 위와 별 다를것이 없었던것 같은데, 아마 어머니의 눈에는 막내아들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던것 같다.


10월이 되고 나니 부쩍 해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어두 컴컴할때 이불 밖에 나와서 쓱쓱 씻고, 늘상 입는 잠바 걸치고, 밤새 차갑게 식은 차에 올라 한 30분 달려서 회사에 도착한다. 도착해서 지하에 차를 세우고 엘레베이터의 눈부시게 밝은 빛아래 한 10초 정도 서 있게 되는데, 그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말그대로 꺼주리하고 눈이 때꾼하다. 반짝 반짝 밝게 빛나는 귀 옆에 흰머리가 유독 돋보이는 그 순간 늘 고민한다. 염색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흰머리가 있다는 것이 없는것 보다 낫다는 40대 동료들 사이의 썰렁한 농담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다시 거울속의 나는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잊고 또 하루를 보낸다.


가을의 늦은 오후는 쓸쓸하다. 생기 있었던 것들이 막 그 기운을 잃어버리고 있는 그 계절과 시간. 아예 겨울이 되어 버리면 종종 걸음을 치며 건물에서 차로, 또 건물로 갈아타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아예 생기있었던 시절은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만, 가을은 다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그 계절은 천천히 산책하기에 아주 적합한데, 그 망중한속에 사라져 가는 생기에 대한 쓸쓸함이 차오른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지금의 이 시간들의 생기를 그리움으로 추억할 것이기에, 마땅히 지금은 감사해야 할 것이고, 내가 잃어버린 생기 만큼 또 어떤 생명들은 몇배로 쑥쑥 자라나고 있기에 보람을 느껴야 할 것이고, 몸의 나이보다 마음의 나이가 중요한 것이기에, 생기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겠으나, 아직은 머리로 이해 되는 이 수많은 설명들에 큰 위로와 위안을 느끼기는 힘들다.  


이렇게 한 껏 코 빠뜨린 모습으로 쓸쓸함속을 허우적 대는 나를 보면 분명히 그 분은 한마디 하실거다. 어이구 아주 감정이 끝이 없으시네요.  호호 (얼마전부터 우리는 서로 센티멘탈해 질때마다 감개무량을 이렇게 풀어서 서로 놀리곤 한다) 꺼주리... 하다는 장난기 어린 핀잔에 담긴 반전의 유머가, 꾼하다는 사랑과 연민이 담긴 다독임의 한마디가 거울속에 나에게 필요한 딱 그 말인것 같다. 삶의 중간 어디에 반 이나, 혹은 반 밖에 남지 않았을 그 생기에 대해 아직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꺼주리한 꾼함 그 사이에서 쓸쓸함을 무사히 넘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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