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분노-[공포]-흥정-수용
분노의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는 공포심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건 바로 "외로움"이었다. 이젠 혼자가 되다는 생각과 내가 이혼 후에 늙어서 죽을 때까지 평생 혼자 살다가 외롭게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무서웠다. 물론 주위에선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아직은 젊다(?)라는 이야기도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어버린 내가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게, 나에겐 그저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졌다. 이혼을 한다라는 사실만으로, 나의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다. 물론 나보다 더 힘든 결혼생활과 이혼을 겪은 분이 보면, 내가 하는 고민은 그저 투정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혼 후 나를 찾아 올 외로움이란 감정은 예능이 아니라 다큐였다.
외로움에 대한 공포는 생각보다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먼저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자존감 하락이었다. 이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었다.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난 상대를 보고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이 "저 사람은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배우자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부러움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식 자랑이나 배우자 자랑을 할 때면, 괜히 그 사람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난 이렇게 불행한데, 왜 이리 상대는 행복해 보이는 걸까?"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과 질투심에 사로잡힐 때가 너무 많았다.
수치심으로 인한 자존감 하락도 있지만, 또 다른 한 가지 감정이 날 수시로 괴롭혔다. 그건 바로 죄책감... 이 죄책감에는 두 가지의 죄책감이 있는데, 바로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과 살아계신 어머니에게 불효했다는 죄책감. 이 두 개였다.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은, 회사나 주위 친구들에게 내가 이혼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함에 따른 죄책감이었다. 주위 사람이 나에게 아내 안부를 물어보면, 그저 잘 지내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들의 대답을 애써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이 죄책감은 내 인간관계에 정말 악영향을 미쳤다.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으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회피하고, 집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퇴근을 하면, 집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설,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다 대고, 고향에 내려가질 않았다. 어차피 내려가면, 아내에 대해 물어볼 것이고, 난 잘 지낸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너무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맞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야, 여기서 따로 적지 않아도 어떤 감정일지 모두 다 알 꺼라 생각하니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하지만, 불효를 했다는 죄책감은 어머님을 포함한 형제, 자매들과 나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고, 가족과의 소통이 끊어져버리면서 난 더 큰 불효를 하는 악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은 내가 노년에 홀로 외롭게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증폭시키는 이유들이 되어 나의 삶을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이혼을 한다는 공포는 나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내와 이혼 문제로 다투는 과정에서, 불면증에 시달렸던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아니면 스트레스가 심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심장에도 문제가 생겼다. 심장이 좋지 않기에,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병원에 가서 심장 초음파, CT, 피검사 등등 여러 가지 진료를 받았고, 최종적으로는 부정맥과 서맥 소견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부정맥 소견을 받고 난 후, 난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여러 에피소드에서 하나로 꼽힐 만한 일을 겪게 되었다. 진료를 받고 있는 내 얼굴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의사 선생님은 나의 병명을 이야기하고 나서 한마디 더 덧 붙였다. "죽지는 않아요." 이혼 문제로 생각이 많아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의 귀가 번쩍 띄어지는 소리였다. "예? 죽지는 않는다구요?" 나도 모르게 의사 선생님에게 소리치듯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다시 한번 (매우 사무적인 표정으로) "네 신경이 많이 쓰이고 죽을 것 같겠지만, 죽지는 않아요." 의사 선생님은 부정맥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 주신 거지만, 난 왠지 그 이야기가 지금 나의 이혼 문제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나를 향해 건넨 위로의 이야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혼을 해도 신경이 많이 쓰이고 외롭고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아요."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습게도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는 힘들어하는 나에게 작은 위로를 주었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 잠을 청하려 하는데 주체할 수 없는 공포심으로 숨이 막혀 잠을 자지 못하거나, 불면증으로 인해 잠을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외로움으로 인해 잠을 청하지 못하게 되거나, 홀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날 짓 눌러도 이젠 예전보다는 훨씬 괜찮다. 갑자기 찾아오는 공포심으로 인해 답답한 숨을 몰아 쉬게 될 때도, 이젠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죽지는 않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