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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의언니 Jun 02. 2022

우리의 하루

성폭행 피해 후 일상을 유지하는 노력에 대하여

     아침으로 고등어를 구워 먹고, 주 2회 등록해 둔 요가를 빼먹지 않고, 해가 높이 뜨는 시간에 동생과 손을 잡고 석촌호수를 산책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둘 다 일을 쉬고 있어 하루가 통째로 우리 것이었다. 해가 뜨는 시간쯤 눈을 뜨면 동생과 나는 삼시 세끼를 건강한 음식으로 차려먹었다. 집에서 식사를 하기 어려울 땐 나물이 잔뜩 나오는 청국장 집이나 야채가 풍성하게 포함된 메뉴를 골라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밥을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꼭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쨍한 바람이 부는 한겨울이었지만 얼굴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천천히 걷노라면 마음에도 조금 볕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잠깐 샛길로 빠져 쇼핑을 하기도 했다. 바깥은 아직 한겨울이었지만 백화점에는 한 계절 일찍 봄이 와있었다. 초봄에 입기 좋은 얇은 경량 패딩과 비즈가 잔잔하게 붙은 얇은 스웨터, 튤 스커트 따위가 나와있었다. 머리를 밀어버린 후로 뭘 입어도 자동으로 힙함이 장착되어 새 옷에 별 흥미 없이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고 다녔지만 동생은 달랐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싶은 것도, 어디서 보고 시도해 보고 싶은 스타일도 많았다. 동생보다는 내가 눈썰미가 있는 편이라 동생이 원하는 스타일에 따라 이런저런 코디를 추천해 주었고 내 안목이 아주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언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찾던 옷이야!” 하며 피팅룸을 왔다 갔다 했다. 동생은 근래에 조금 체중이 줄어서 어떤 옷이든 입고 나오면 태가 났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고객을 언니라고 부르는 사장님들이 몇 마디 덧붙일 필요 없이 우리는 몇 군데의 브랜드를 돌며 허리끈이 달린 퀼티드 카라 점퍼와 청바지, 아이보리색 앵클부츠를 샀다. 동생은 때때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잔뜩 멋 부린 채였다. 2000년대 히트곡을 부르다가 전에 없이 신이 나서 노래방 소파 위에 올라가 탬버린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미디어에서 뻔하게 그려지는 나이 든 상사 같아 ‘김 부장’이라는 별명을 얻고 집에 들어와 이불을 찼다. 그날 동생은 퀼티드 카라 점퍼에 딸린 허리띠를 잃어버렸고 가게에 문의한 결과 세트 상품의 일부만을 따로 구매할 수는 없으며 해당 브랜드가 포함된 몰에서 비슷한 모양의 벨트는 40퍼센트 할인가에도 12만 9천 원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이불을 찼다. 술이 세서 평소에는 맥주 한 잔에도 취해버리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동생이었기에 잊을만하면 ‘김 부장’하고 동생을 불러 놀렸다. 동생은 으아아, 소리를 내며 타조처럼 머리만  이불에 폭 묻었다.


밖에서 보면 팔자 좋은 자매의 삶이었을 것이다.

나도 낮에 석촌호수에서, 백화점에서, 영화관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동생의 두 번째 피해 이후 우리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경험은 무시 못한다고 하던가. 한 번으로도 족한 일을 두 번째로 겪었을 때(동생은 ‘more than enough’라고 표현했고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놀랍게도 지난 사건에서 몸으로 습득한 것들이 자연스레 삶에 배어 나왔다. 매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외의 생활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규칙성을 유지했다. 그게 질 먹고 잘 자고 매일 걷는 일이었다. 위장장애를 피하고 좋은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바깥 음식은 되도록 피하고 부지런히 집 밥을 해 먹었다. 일정 수준의 수면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낮잠은 삼갔다. 낮에는 해가 있는 곳을 찾아 적어도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했다. 해가 떠있는 동안 활동을 해야 낮과 밤의 경계가 확실해지고 낮 동안 몸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소진해야 밤에 조금이라도 잠에 들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자는 동안 세네 번씩 깨고 새벽 세 시에 눈을 떠서 뜬 눈으로 해가 뜰 때까지 누워있더라도 수면의 질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는 잠에 들어있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이 지치는 정도를 어느 정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한 명의 기분이 가라앉을 땐 다른 한 명이 힘을 내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걸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횡단보도 한가운데 주저앉고 싶고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천천히, 때로 몸에 힘이 빠져 뒷걸음을 치게 되더라도, 문 닫은 가게 앞의 턱에 좀 앉기도 하면서, 손에 붕어빵을 들고, 서로를 달래며 우리는 걸었다. 그래야 사니까.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의 삶을 망쳐버리게 둘 수 없었다.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낭떠러지 위에 남은 겨우 한 뼘 정도 폭의 길을 걷듯 매 순간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발동해야 하는 일이었다. 반대로 사건 진행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큼지막한 흐름만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하나하나 다 기억하려다가는 정작 중요한 점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해바라기 센터에서 피해 사실을 진술했고 산부인과를 검사시기에 맞춰 방문했다. 업무 중 일어난 피해였기 때문에 직속 상사와 법무팀과 인사팀, 기업 내 간호사와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하며 그들 사이의 불통을 해결했다. 변호사를 만나서 두 번째로 피해사실에 대해 진술했고,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관할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 세 번째로 사건 진술할 날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내리는 결정이 결과적으로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모든 수를 따져보는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주안점을 맞춰 생각했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데 집중했다. 동생이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듯 ‘후회도 살아있어야 하는 거’니까.


지금 내린 하나의 결정에 따라 미래가 얼마나 많이 변할 수 있는지 알면서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데 다들 동생에게는 당장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해바라기 센터에서는 72시간 내 성병 검사를 받는 것을 권한다고 말했지만, 검사와 동시에 사건이 접수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이 경찰서에 접수된다는 것은 곧 가해자가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게 된다는 뜻이었다(추후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검사를 진행하고도 사건 접수를 지연/중단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 부분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 당장 업무를 얼마 동안 쉴지, 그렇다면 쉬는 동안 사용하게 되는 것은 병가인지 휴직인지, 월급은 나오는지, 나온다면 언제까지 일한 월급이 나오는 것인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와중에도 거래처에서 연락이 끊이질 않았다.

직장 상사와 갑작스러운 휴가에 대해 말을 맞추는 동안 사내에서도 업무 관련 연락은 빗발쳤다. 일은 쉬고 있는데, 쉬는 게 아니었다.


의협심이 강한 동생은 첫 피해 후 뒤에 올 여성들을 위해 사건 접수를 결심했다. 그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한 번 그 길을 걸어보고 나니 결코 두 번 할 짓이 못되었다. 동생은 왜 성폭행 생존자들이 가해자의 유죄판결을 확인한 후에 자살하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여성들을 생각하는 대신에 자신이 사건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이성을 내려놓고 마음의 소리를 따를 수 있도록 다른 선택을 해본 것이었다. 마음이 동한다면 새로운 옷도 사보고, 팔과 목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를 해보고, 취할 때까지 실컷 술도 마셔본 것이다. 나는 그런 동생 옆에 그저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가해자로부터 지속적인 전화와 문자 연락이 왔다. 우선 동생의 직속 상사가 담당 업무를 맡는 것으로 결정되고,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가해자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심장이 뛰고 겁이 나서 일상생활이 어렵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낸 후에야 핸드폰을 끌 수 있었다. 급한 대로 동생의 직장과 변호사에게 내 번호를 공유해두었다. 이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그 틈새에서 우리의 삶을 유지해야 했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들과 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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