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낀 아름다운 북쪽길
산티야나 델 마르 Santillana del Mar라는 이름은 성스러운(santo) + 평원(llana) + 바다(mar)의 의미라고 한다. 이 이름 때문에 세 가지 거짓말의 마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마을 이름과 달리 성스럽지도, 평평하지도 바다를 접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작은 마을임에도 숙박시설과 식당 등이 많은 것은 아마도 근처에 있는 알따미라 동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중세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코블로드라고 하나?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들을 촘촘하고도 가지런히 박아 만든 도로를? 코블 도로로 유명한 대표적인 사이클 경주 대회로는 파리-루베(Paris-Roubaix)가 유명하다.
어쨌든 최근 만든 포장도로가 아닌 오래된 도로를 보니 낮에 둘러봤어야 했다는 자책이 든다. 아, 순례길을 걷는 중에도 게을러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시작부터 힘들게 언덕 위로 올리더니 바로 보상이다. 동터오는 풍경이 제법 멋지다. 산띠야나 델 마르에서 꼬미야스까지의 구간은 100m 내외의 언덕이 10개쯤 있는 구간이라 정신적으로 털리기 쉬운 구간이다. 시시 때때로 욕이 튀 나온다. 편하게 걷자고 떠난 길이 아님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마음보다 간사한 게 또 있을까?
스페인의 동네 간판은 몇 가지 형식이 있다. 현란한(촌스러운) 것, 단순한 것, 멋진 것...
작은 경당을 지나 이어지는 내리막 길 앞으로 같은 곳에서 묵었던 순례자들이 꽤 많이 보인다. 중간중간 인사를 하면서 걷는데, 이렇게 순례자와 앞에 펼쳐진 길을 같이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항상 사진으로 남기려고 노력한다. 이 길엔 사람 그러니까 순례자가 있어 순례길의 감동도 확실히 커진다.
다시 언덕을 향해 해변 쪽으로 향하는 길 정상부에는 '성 뻬드로 성당'이 우두커니 햇볕을 받고 서있다. 성당 앞마당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작은 규모의 마을이 이어진다. Barrio Caborredondo라는 이름의 마을에 들어서면 작지만 잘 관리되고 있는 아름다운 성당인 Ermita de San Bartolomé를 한 바퀴 둘러본다. 작지만 꽉 찬 느낌?
마을 중심부에 들어서면 야외에 테이블을 깐 Restaurante las Sopeñas에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각자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먹기도 한다. 나도 콜라와 감자 오믈렛을 시켜 잠시 쉬어간다. 담배도 한대 피워주니 참으로 좋다.
길은 차량 통행이 드문 차도로 이어지다가 또 동네 골목길 그리고 숲으로 난 흙길로 이어진다.
숲길인지 산길인지 그냥 길인지 애매한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곳에 갑자기 성당이 하나 떡하니 나타난다. '성 마르틴 성당'이라고 한다.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문이 열려있는 여름 성수기에는 가이드와 함께 내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바로크 양식으로 1700년대 중반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뭐 북쪽길의 시골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크기나 형태는 아닌 듯했다.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상당히 따가운 햇볕을 피해 걷다 보니 Cobreces 꼬브레쎄스라는 마을에 들어선다. 마을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걷다 중심지에서 바르에 들러 까페 꼰 레체 한잔 마시며 쉬어 간다.
다시 얼마간 걷다 보니 시야가 확 트이며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해변의 이름은 루아냐 비치(Playa de Luaña)이다. 독일에서 온 친구인 게일이 먼저 와 바다를 감상하고 있길래 한컷 찍어 주었다. 근데 이놈의 카메라는 사람을 찍을 때 피부색이 좀 붉게 나오는 경향이 매우 강한 듯하다. 나는 걸음이 느리므로 잠시 해변을 눈과 카메라에 담고 다시 걷는다.
짧지만 가파른 언덕이 세상 힘들다. 루아나 해변을 빠져나오는 길은 급격한 오르막이었고 언덕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또 보상이 되어준다.
잠시 남쪽으로 걷다 다시 동북쪽 바다가 보이는 방향으로 방향을 트니 '루일로바' 마을의 입간판 조형물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는 다시 바다가 멀리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인 '꼬미야스'까지는 이제 6km 정도 남은 듯하다. 거의 혼자 걷다 보니 도보 순례여행이 참으로 단순해지는데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피곤한 일이 또 많으니 이래도 저래도 어떤 선택도 나쁜 것은 없다. ^^
루이로바 지나고 다시 꼰차 마을을 통과하자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다. 언덕을 돌자 오늘의 목적지인 꼬미야스의 활기차 보이는 주황색 지붕들이 가깝게 보인다.
꼬미야스는 대부분의 순례자가 하루 머물다 가는 곳이다. 규모도 제법 크고 서비스 시설이 여럿 있고, 가우디의 건축물도 있는 곳인 만큼 반나절쯤 동네 구경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알베르게 위치가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마을 중앙 광장에서 식사나 음료를 마시고 바닷가 전망대로 가려면 다시 오르막을 잠시 빡세게 올라야 하는데, 이 동네 꼬미야스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죽은 자를 위한 공동묘지였다. 바닷가에 접한 언덕 정상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는 어느한곳 막힘없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해주고 있다.
지도에서 보듯이 이 구간은 오르락 내리락이 심하게 많아 멘탈이 털릴 수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정신무장이 필요한 곳이다.
다시 또 어둠과 함께 시작이다. 오늘은 운께라 혹은 꼴롬브레스까지 걸으려고 하는데 뭐 걷다 보면 알게 되겠지. 순례길을 이어가기 위해 마을 성당까지 내려왔다가 길을 찾아 걷는다. 이곳에도 가우디의 유명한 건축물이 있다고 해서 슬쩍 찾아봤지만 결론은 못 만나고 그냥 간다.
도로 곁을 따라 한참이나 일직선으로 걷다 보니 어느덧 7시가 넘어가면서 사위가 밝아온다. 시야가 터지면서 폭이 꽤 넓어 보이는 강, 사행천(蛇行川)이라고 하나 물줄기가 구불구불해 보이는 곳을 만난다. 바다와 만나는 하구인데 아마도 밀물 때는 잠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새벽에 큰 마을을 빠져나올 때는 화살표를 잘 찾아야 하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그론세 지도와 mapy 지도 앱 등이 큰 도움이 된다.
강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안 가는 곳을 다시 건너자 차도의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왼쪽으로는 캠핑장이 자리하고 있는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게 된다. 오르막 끝에 도달해 바다 방향의 벤치에 앉아 준비한 자두와 오렌지 주스로 당을 채우는데 좀 쌀쌀한 느낌이 살짝 드는 바다의 풍경이 참 좋다. 이런 곳에서는 담배 한 대 피워 줘야지. 1년 넘게 안 피우던 담배를 이곳에선 너무 쉽다. 쉬고 있는데 지나온 방향에서 해가 뜨기 시작한다. 7시 반이 훌쩍 넘어 8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뜨기 시작한다.
오르막을 넘어서자 내리막이 길게 이어지며 왼쪽으로는 Pico de Europa가 오른쪽으로는 Gerra, Bederna, Merón, Puntal, La Maza라는 이름을 가진 해변이 이어진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은 캠핑장과 호텔, 상가 등이 있는 해변 마을을 지나는데 일찍 문을 연 바르가 있어 까페 꼰 레체 한잔하면서 잠시 쉬어간다. 멀리 피코 데 에우로파를 바라보며 투명한 컵에 담긴 멋 부리지 않은 무심한 라떼...
여러 개의 강줄기가 모인 하구는 바다로 이어지고 이곳에 자리 잡은 동네의 이름은 '산 빈쎈떼 데 라 바르께라'
뱃사공 성 빈쎈떼라는 의미인데 아마도 이곳을 일군 사람이 성인으로 추앙받았나 보다.
사실 이런 곳을 도착지로 하고 하루 묵으며 돌아보는 것이 좋겠으나, 처음 와보는 곳인데 어디가 좋고 어디가 안 좋은지에 대한 정보도 없고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거리도 있으니 좋아 보이는 곳을 그냥 스치듯 지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을 말이다.
다시 길은 언덕 위로 이어진다. 가팔라 보이는 언덕 길이 정신을 힘들게 만든다. 별 수 없다. 그냥 걷는 수 밖엔. 언덕 정상엔 너른 초원과 커다란 나무와 그 밑에 벤치가 놓여있다. 딱 쉬어 가라고 만든 장소다. 냉큼 자리를 잡고 신발도 양말도 벗어 놓고, 자두와 음료수로 지친 몸에 에너지를 넣어 준다. 벤치의 위치가 정말 너~무 좋다. 피코 데 에우로파가 눈앞에 펼쳐진. 이런 멋진 곳에 벤치를 놓아준 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탑을 지나면 잠시 후 마을을 하나 만나고 그 마을을 지나면 다시 숲에 만들어진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길이 이어지고 잠시 후 다시 큰 차도를 만나고 그 차도는 난사 Nansa 강과 이어진다. 강의 수량이 풍부하고 물고기도 많이 보인다.
기찻길과 나란히 누운 좁을 길을 따라 걷다가 큰길로 빠져나오니 깐따브리아의 마지막 동네인 'Unquera 운께라'에 도착한다. 마을에서 라레도의 알베르게 같은 방을 썼던 까스뜨로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고 어디서 묵는지 서로 묻고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같이 먹는다. 스페인 현지인과 식당에 가니 나름 편리한 부분이 있다. 나는 샐러드와 닭다리 구이를 메인으로 하는 메뉴 델 디아와 물을 까스트로는 이쪽 지방(아스뚜리아스)의 특산물인 사과 탄산주인 시드라와 쵸리소가 들어간 국밥 비슷한 음식을 시켰다. 시드라 맛을 좀 보았는데 시큼 털털한 것이 맛이 좋지는 않았다. 나의 닭다리 구이는 참 맛있었는데 말이다. 이 친구는 군인이라고 했고, 휴가를 내서 북쪽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운께라의 뻰시온(펜션)을 예약했다고 해서 식사 후 헤어져 나는 Asturias아스뚜리아스의 첫 마을 Colombres 꼴롬브레스의 알베르게까지 걸었다.
다리를 건넌 후 배부른 상태에서 다시 또 언덕을 오른다. 젠장...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Albergue El Cantu'에 도착. 파란색의 건물이 상쾌해 보였다. 체크인하고 침대시트와 베개 시트를 받아 배정받은 방의 침대로 가 짐 풀고 핸드폰 배터리부터 충전한다. 알베르게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순례자로 거의 풀이다. 난간이 없는 침대의 2층 오늘 밤 잘 잘 수 있을까?
이곳은 샤워실이 하나인데 남녀 구분이 없어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샤워부스의 문이 우윳빛 간유리라고 해야 하나? 투명하지는 않지만, 유리에 가까지면 더욱 잘 보이는 형태라 샤워 중인 여성 순례자를 봤기 때문에... 알베르게의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이 샤워실과 화장실이 한몫한 듯했다. 15유로라는 요금이 참 애매한 가격이긴 했지만 난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 도보 여행이 되고 있다. 물론 발이야 좀 아프지만, 숙소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먹는 것도 비교적 잘 찾아 먹고 있는 편이다. 좋은 레스토랑에 들러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뭐 먹으러 온 것도 아니고 괜찮은 식당은 꽤 비싸고 혼자서 먹기에 양을 맞추기도 어렵고... 이유야 다양하다. 바다와 인접한 지역이라 분명 해산물 요리들이 맛있을 텐데 먹어 본 거라곤 오징어튀김이 전부였네. 역시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맞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 여행도 충분히 좋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