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1

바다는 없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북쪽길

by 감뚱

4. 모든 순례길의 목적지 Galicia 지방

■4-2 길을 잃었다. 그런데 꽤 괜찮다.

갈리시아의 4,5일 차는 Vilalba 빌랄바 ~ Parga(A Pobra de Parga) ~ Sobrado dos Monxes(por As Cruces)의 63km 구간. 중간 마을인 바아몬데(Baamonde)에서 Sobrado dos Monxes 소브라도 도스 몽세스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루트가 있다. 40km 길이의 전통적인 루트인 Miraz 미라스 마을을 지나는 방식과 2017년 지방정부에 의해 새로 표지판이 추가된 32km 거리의 por As Cruces 뽀르 아스 크루쎄스 루트 중 고를 수 있다. 미라스 루트 대신 뽀르 아스 크루쎄스 길을 선택한 난 안 그래도 사람이 별로 안 다니는 길안에서 또 길을 잃어 두 시간 넘게 원시의 숲 안에 흐르는 빠르가 강을 따라 이동했다. 정상 루트는 아니지만 그 길이 주는 천연의 느낌 때문에 꽤 괜찮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덕분에 앱에서는 빌랄바에서 바아몬데까지 18.3km, 바아몬데에서 목적지인 빠르가까지 7km라고 소개했지만 실행 도상거리는 30.7km로 5km 정도 돌아온 셈이다.

P1132247.JPG 빌랄바 소방서 앞의 노란빛을 뿜어내는 가로등이 따뜻한 느낌을 준다.

오늘의 시작도 역시 해뜨기 전이라 어둡지만, 마을 중심은 가로등이 있어 불편함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빌라바 중심의 알베르게는 역시 좋아 보였지만, 공립 알베르게도 충분히 좋았으므로 아쉬울 건 없다. 낯익은 한글을 만날 수 있었는데, 스페인 시골도시에서 만난 태권 도장이 꽤 반가웠다. 국뽕이 차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P1132249.JPG 빌랄바 중심 마을 이면 골목을 따라가는 길
P1132250.JPG 이런 시골 동네에서 한글로 적힌 태권도장을 만나다니...
P1132252.JPG
20221007_081918.jpg
Igrexa de Santa María de Vilalba, 새벽미사가 없었는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 8 각형인지 6 각형인지 애매한 탑이 하나 보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국립 파라도르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Castillo de Andrade' 성의 일부라고 한다. 파라도르 호텔은 스페인의 오래된 건축물을 활용해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각 도시마다 거의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거의 4성급이었던 것 같고 이곳은 평일에는 10만 원 내외라 부부가 같이 순례길에 이용해도 참 좋을 것 같다.

P1132253.JPG 'Castillo de Andrade' 안드라세의 성, 현재는 국립 빠라도르 호텔로 사용되고 있었다.
P1132256.JPG

우기가 시작되는 10월 즈음부터 갈리시아 지방은 아침 안개가 기본값인 듯싶다. 언제부터인지 아침엔 계속 안개를 만난다. 나무가 우거진 길과 안개가 내려앉은 시골 풍경이 참 좋다.

P1132258.JPG
P1132263.JPG
목적지에 가까워서 인지 순례자가 많이 늘었다.
P1132267.JPG 빌랄바와 떨어진 농가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P1132268.JPG 오레오와 크루쎄이로
P1132270.JPG 농가 창고 건물 앞의 표지석과 지나는 순례자. 뭔가 잘 어울리는 하나 된 느낌이다.
P1132272.JPG
P1132273.JPG
수확중인 호박이 색상도 독특하 상당히 크다.
P1132274.JPG 소박한 모습의 시골 농가 주택. 땅도 넓은데 단층이 아니고 2층이다.

빌랄바에서 5km 좀 넘게 걸어 꽤 오르막인 곳 정상즈음에서 뒤돌아 보니 헉! 빌랄바의 높은 건물 상층부만 안개의 바다에 섬처럼 떠 있는 듯 보인다. 카메라 렌즈에 이슬이 맺히는 바람에 선명하게 찍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200mm 이상의 망원 렌즈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1007_091614.jpg 빌랄바 중심 마을 건물의 꼭대기 부분만 섬처럼 보인다.
P1132279.JPG
P1132281.JPG
같은 장소에서 왼쪽 사진은 빌랄바의 건물이, 오른쪽 사진에선 숲의 나무가 섬처럼 보인다.

순례자의 뒷모습. 길과 참 잘 어울린다. 가끔 사진에 찍힌 순례자를 알베르게에서 만나면 이메일 주소를 묻고 사진을 보내줬다. 나도 뒷모습이 찍히고 싶지만, 난 날 찍을 수 없다. 뒷모습의 사진을 받는 기쁨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난 합법적으로 사진을 얻는다. 물론 동의받지 않은 촬영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고 딱히 상업적인 기고에 사용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P1132282.JPG
P1132287.JPG
P1132289.JPG
가을이 깊어가는 순례길의 순례자.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P1132283.JPG
P1132284.JPG
버섯 가족들
20221007_095021.jpg

조용하던 길은 고속도로와 만났고 그곳에서 다시 안개바다의 빌랄바를 만난다.

P1132294.JPG
P1132297.JPG
Igrexa de San Xoán de Alba, 성당이자 공동묘지. 지금은 공동묘지의 역할만 한다. 대부분 이렇다.
P1132298.JPG 성당 앞 크루쎄이로의 십자가 장식
P1132301.JPG
P1132302.JPG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가까워져서 인지 순례자를 자주 볼 수 있었다.
P1132305.JPG 표지석 위의 빨간 수통이 눈에 띄어서 한컷. 쓰레기를 저렇게 놓으니 뭔가 작품 같기도...
P1132306.JPG
P1132307.JPG
다양하고 아름다운 길
P1132309.JPG
P1132311.JPG
형태는 다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
P1132314.JPG
P1132315.JPG
언덕을 횡으로 지나 올라가는 길 한가운데 커다란 누렁이 한마리가 길막을 하고 있네. 이 정도는 견생승리라고 봐도.
P1132317.JPG
P1132318.JPG
P1132323.JPG
카메라를 자꾸 들게 되는 순례길 풍경
P1132324.JPG
P1132325.JPG
Capela do Carmio
P1132327.JPG Baamonde 마을로 가는 길에 꽃을 사랑하는 집주인의 마음이 느껴지는 꽃으로 포장한 시골집을 지난다.
P1132328.JPG 시골집 감성 참 좋네.


P1132331.JPG
P1132330.JPG
Ermida de Santo Adrián

'Baamonde'에 들어선다. 이곳에는 공립알베르게도 있으나 너무 이른 도착이기도 하고 이미 예약해 놓은 Parga까지 가야 했기에 식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배도 고프고.

P1132335.JPG 바아몬데 마을 입구.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이다. 보통 이곳에서 하루 머무는 게 일반적.

로터리에 위치한 Café-Bar A Rotonda에 들어가 쁠라토 콤비나도 plato combinado와 맥주를 주문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가운데 귀여운 점원이 열심히 들어주어서 주문을 마치긴 했다. 로모, 우에보, 빠따따스 달라고 했는데 뭐 원하는 대로 나오긴 했다. 맛은... 그저 그랬지만 배를 채워야 했기에 남김없이 먹었다. 그나마 8유로였으니 이 정도면 만족. 서비스 안주인 올리브는 짭짤하긴 한데 솔직히 뭔 맛인지... 짭짤한 미원에 절인맛? 잘 모르겠다. ㅋ

20221007_140355.jpg 메누 델 디아는 안된다고 해서 꼼비나도 쁠라또를 시켰다. 로모, 우에보, 프리또 빠따따스 그리고 맥주 한잔과 절인 올리브
P1132336.JPG
P1132337.JPG
Igrexa de Santiago de Baamonde 바아몬데의 산티아고 성당
P1132338.JPG 바아몬데를 빠져나가는 길
화면 캡처 2025-06-21 104943.jpg 점선이 40km 미라스 루트, 실선이 As Cruces 루트. 나는 실선 코스로
P1132339.JPG 100km 표지석. 700km 걷고 100km 남았다.
P1132342.JPG Capela do Santo Alberte 가는 길.

갈리시아 들어오면서 부추처럼 생긴 풀에서 보라색 꽃이 피어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닥에서 자라 딱히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구간 중 숲 속 길에 잘 보존된 'Capela do Santo Alberte en San Breixo' 유적 근처 풀밭에 무더기로 피어 있어 성당 구경을 하는 김에 바닥에 앉아 이 꽃들을 담아 보았다. 표준 줌렌즈 1개로 잘 담을 수 없는 게 좀 아쉬웠지만. 사실 뚠뚠한 내 몸뚱이는 쪼그려 앉는 게 너무 힘들다.

P1132344.JPG
P1132345.JPG
이름은 모르는데 아무튼 예쁜 보라색의 꽃.
P1132346.JPG
P1132350.JPG
Capela do Santo Alberte

꽃도 구경할만했지만 외진 곳에 있는 성당 유적인 'Capela do Santo Alberte en San Breixo'은 뭐랄까 좀 신비로왔다고나 할까? 성당 옆으로는 느리게 흐르는 'Parga 빠르가'강과 강변의 하이킹을 위한 소로가 있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하비에르를 이 성당에서 만났다.

P1132355.JPG Capela do Santo Alberte
P1132357.JPG Capela do Santo Alberte
P1132354.JPG Capela do Santo Alberte 마당의 보라색 꽃들.

10분 넘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길을 찾아 걷는데, 그론세 앱에 따르면 이곳에서 길이 오피셜 로드와 대안 길로 나뉘게 된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이 길을 가게 된다면 mapy.cz 맵을 참고하지 말고 노란 화살표를 찾아 걷는 것을 우선으로 하길 바란다. 지도를 읽는 나의 착각은 강을 따라 나있는 mapy.cz의 노란색 하이킹길을 쫓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좀 많이 돌아가는 코스였다. 1시간 정도는 손해 본 듯하다. 그래도 강을 따라 나 있는 매우 한적하고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어서 나름 좋았다. 다만 혼자서 어두울 때 걷는다면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

P1132359.JPG
P1132363.JPG
여기서부터 공식 루트가 아닌 지역의 트래킹 루트를 따라 걸었다.
P1132361.JPG 원시림이 잘 유지되는 느낌의 빠르가 강과 주변 숲
P1132364.JPG 단선 기찻길도 만나고.
P1132367.JPG 유속이 느려 연못처럼 보이는 빠르가 강
P1132373.JPG 바위 왼쪽 상단의 흰색과 노란색 표시가 트래킹 루트를 표시하는 것임을 알았다.
P1132374.JPG 사람 손이 타지 않은 강의 모습
P1132376.JPG 고요한 강변 풍경
P1132377.JPG 길을 잘못 들어 만난 아름다운 빠르가 강의 트래깅 루트

강변의 길을 벗어나 차도로 올라온 후 표지판을 보니 오늘의 목적지 'Parga 빠르가'다. 길을 잘못 들어 힘들었지만 돌아온 숲 속 길은 참 좋았다. 일단 사람 사는 마을에 들어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P1132378.JPG 드디어 빠르가
P1132380.JPG 수변 공원이라고 해야 하나? 길지 않은 거리를 걸어왔는데, 강폭의 차이가 심했다.
P1132381.JPG Iglesia de San Esteban de Parga

오늘의 숙소인 'Parga Natura Alojamiento'는 빠르가 강을 건너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되짚어 내려와야 하는 길을 힘들게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공동묘지와 성당이 아름답다.

오늘의 숙소는 20유로에 예약했는데, 침대는 좀 삐걱대지만 나머지 시설은 깨끗하고 편리해서 좋았다.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피우는 연초 한대는 정말 좋았다.

20221007_185318.jpg
20221007_185331.jpg
이 마을에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알로하미엔또의 테라스. 작고 예쁜새가 날라왔다. 사람손을 많이 탄듯 뭔가 바라는 눈치였지만, 담배말곤 없어서...

식당이 있는 마을로 다시 내려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 그냥 숙소에 저 제공하는 저녁을 12유로에 신청했다. 하지만 맛은 있는데 고기를 안주는 서운함. 비건도 아닌데... 아... 뭐지?

20221007_193608.jpg
20221007_194826.jpg
20221007_200621.jpg
바게트,와인,샐러드,콩조림,플란 구성의 12유로짜리 저녁은 왠지 많이 서운했다. 고기가 없어서.
북쪽길 30일차 램블러.jpg 31km 거리의 갈리시아 4일 차. 참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20221008_075935.jpg
20221008_080022.jpg
이른 아침 숙소를 나와 숙소와 마을 광장 풍경을 한컷

어제 힘들게 올라온 언덕을 거꾸로 내려간다. 차도까지 내려가서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까미노 화살표를 찾지 못하고 강 오른쪽에서 발견한 트래킹 길표시를 따라 다시 강변을 걷는다. 이것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ㅠㅠ 역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젊은 순례자들이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들은 제대로 까미노 화살표를 찾아 걸었기 때문일 건데... 나는 왜 찾지 못한 것일까?

어쨌든 아름다운 아침의 빠르가 강변을 힘들고 상쾌하게 걷는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제대로 가는 방향의 길을 찾아 강변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 까미노 화살표를 찾아 걷는데 마음이 편해진다.

P1132382.JPG
P1132383.JPG
어제에 이어 오늘은 시작부터 돌아 간다.
P1132385.JPG
P1132386.JPG
P1132388.JPG
비슷해 보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운 북쪽 순례길
P1132389.JPG 길가에 조르르 늘어선 습기를 좋아라 하는 버섯가족

8km 넘게 걷다 오픈한 바르를 하나 만났다. 콜라 한 병과 담배 한 대로 잠시 쉬어간다. 'Taberna da Modia 따베르나 다 모디아' taberna는 선술집, 주점, 바의 의미를 가진다.

P1132390.JPG 뭔가 바르 같지 않은 분위기, 순례자가 아니라면 이용할 사람도 없을 것 같은 위치다.
P1132391.JPG 하비에르는 나보다 늦게 출발하지만 항상 날 앞서간다.
P1132393.JPG 친절한 이정표. 파란 바탕의 노란 무늬 조개와 화살표
P1132394.JPG 동네마다 커다랗고 순한 개들이 마을입구를 지키고 있다.

언덕 중간에 있는 마을을 지나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능선을 넘어 아스팔트 곁길과 숲사이 숲길로 계속 이어진다.

P1132396.JPG
P1132398.JPG
P1132400.JPG
길이 직선이 아니라 확실히 지루함이 덜하다.

'아 꼬루냐'주(도) 표지판을 만난다. 아 꼬루냐는 또 하나의 땅끝이라고 알려진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곳이고, 글로벌 패션 브랜드 'ZARA 사라'의 본사가 있는 곳이고 영국길의 시작점 중의 한 곳이다. 이곳 북쪽길에서 '아 꼬루냐'까지 직선거리로는 35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체감할 수 있다.

P1132403.JPG
P1132406.JPG
와... 넓은 초원 뒤로 유칼립투스 조림지가 멋지다.
P1132405.JPG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스페인 순례자 4인방(한 번도 같은 숙소에서 머문 적은 없었다)
P1132407.JPG
P1132409.JPG
한동안 아스팔트 도로 곁을 따라 걷는데 풍경이 괜찮.
P1132411.JPG 빠라뇨스 마을 입구와 표지석

'Paraños 빠라뇨스'라는 작고 깨끗한 마을을 지나는데 바닥에 떨어진 밤을 몇 알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한 개씩 까먹었는데 먹을만하다.

P1132412.JPG 저렇게 많은 밤들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깨끗한 부자 동네처럼 보이는 빠라뇨스.
P1132414.JPG 빠라뇨스 마을의 크루쎄이로
P1132416.JPG
P1132417.JPG
서비스 시설이 없는 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길은 참 좋다.

크진 않지만 레스토랑이 있는 'As Cruces 아스 크루쎄쓰'에서 잠시 쉬어간다. 중심 로터리에 자리 잡은 'Meson Manolo 메쏜 마놀로'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를 할까 했는데, 아직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보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라 그런지 딱히 친절하지도 않고 해서 콜라만 한병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는데 통신회사 차량 같은 밴에서 젊은 친구들이 내리더니 맥주를 마신다. 맥주 정도는 마시고 운전해도 되는 분위기인가 보다. ㅋ

P1132418.JPG
P1132419.JPG Capela de San Roque

'Meson Manolo'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 조금 가면 표시석이 두 개가 나온다. 소브라도 방향의 표시판이 하나 별도로 있고 그쪽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석에 남은 거리가 오른쪽 직진 방향의 표시석에 남은 거리보다 길어 무심코 직진 방향으로 걸었다. 아... 집중력, 판단력이 어제오늘 참 엉망이다.

P1132420.JPG
P1132421.JPG
잘못든 길이 아름다워...

길을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까미노 화살표가 나오기는 하는데 지나는 순례자가 하나도 없다. 뭐 늘 순례자 보기가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mapy.cz를 열어 지도를 확인하니 이 길은 소브라도로 진행하는 길이 아니라 소브라도 지나 Boimil 이라는 마을로 가는 일종의 지름길 같은 길이다. 젠장. 하지만 보이밀 방향의 알베르게는 이 지점에서 20km 정도 가야 하기에 'A Torre' 마을까지 가서 다시 소브라도 방향으로 좌회전해 가는 길을 택했다. '아스 크루세스'에서 4.7km 거리의 길을 10km 넘게 돌아서 간다. 젠장... ㅠㅠ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멘털이 좀 흔들렸지만 어제오늘 걷기 컨디션이 이상하게 좋았다. 때문에 오르막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을 수 있어 왠지 강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그냥 기분 탓인가.

갑자기 집들 사이로 멋진 소브라도 수도원의 성당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와!

P1132423.JPG
P1132427.JPG
잘못든 길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소브라도 도스 몽쎄스 가는 길
P1132428.JPG 제 길로 왔다면 이런 위치에서는 못 봤을 소브라도 성당 모습.

마을 골목 교차로에선 돌 십자상에 피에타(돌아가신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었는데 작은 성모의 얼굴에서 슬픔이 보인건 그냥 착각이겠지.

P1132430.JPG
P1132431.JPG
마을의 크루쎄이로
P1132432.JPG 스마트폰의 10배 줌을 사용해서 찍은 'Mosteir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의 성당 정면부

차도를 따라 이루어진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래 사진처럼 건물 밑으로 만든 터널길을 통과해야 한다. 수도원이나 성당의 접근 방식이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P1132433.JPG 'Mosteir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의 입구
20221008_180206.jpg 입구를 통과한 후 반대쪽 방향에서 본모습

입구를 통과하면 상당한 규모를 가진 성당의 모습이 멋지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Mosteir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갈리시아어 표기)는 소브라도에 있는 수도사들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라는 의미. 951년경 처음 세워졌다고 하고 쇠퇴기를 겪다가 17세기에 대규모 재건축과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835년 스페인의 교회 재산 몰수로 인해 문을 닫았고 수십 년 넘게 방치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66년 시토회 수도사들이 돌아와 정부 기관 및 개인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복원되고 수도생활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북쪽길에서는 꼭 머물러 가야 할 매우 의미 있고 아름다운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는 수도원 성당이다.

20221008_182425.jpg 한 구획 안에 작은 성당 Igrexa de San Pedro de Porta, 커다란 수도원과 수도원 성당이 공존하고 있다.
P1132435.JPG Mosteir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
20221008_175852.jpg Mosteir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
20221008_175902.jpg
20221008_175946.jpg
20221008_182615.jpg
20221008_182714.jpg

알베르게 입구에서 신부님 한분과 도우미 한분이 친절하게 접수를 받는다. 침대를 배정받고 수도원의 중정을 지나 방에 도착하니 개보수(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하고 깔끔하고 쾌적했다. 이층 침대는 매우 튼튼하게 벙커 타입으로 만들어져 삐걱거리지 않아 좋다. 기대하지 않았던 공립 알베르게에 마음이 좋아진다.

아름다운 수도원 성당 안에 만들어진 알베르게인데 편리하기까지 하다니.

20221008_183008.jpg 3면의 회랑을 따라 알베르게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20221008_185846.jpg 몇몇 팀이 한마음으로 저녁을 공동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깨끗한 샤워실에서 씻고 빨래하고 마트 가서 먹을거리와 발바닥 통증완화를 위한 볼따렌 뽀르떼를 사서 돌아왔다. 그냥 레스토랑 들어가서 사 먹을까 하다가, 이곳의 부엌 시설이 너무 좋아 간단히 먹기로 한다. 문어 통조림(문어인지 오징어인지?), 컵라면, 바게트, 살치촌, 요구르트, 콜라, 맥주... 진수성찬이다. 이태리 할아버지 4 인조 +1인 + 스페인 처자 2명의 무리들은 다른 무리들과 합세해 주방을 점령하고 요리 삼매경에 빠졌다. ㅋ

20221008_184505.jpg 나는 간편식이지만 정식처럼 푸짐하게.

식당에서 앞뜰이라고 해야 하나, 뒤뜰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빨래를 말리는 곳으로 나왔는데 오래된 수도원 건물과 담쟁이, 빨래들, 그리고 쉬고 있는 순례자를 보니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다. 큰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아쉽다.

20221008_193200.jpg 너무 편안하고 따뜻한 풍경에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다.
20221008_193243.jpg 건물벽의 담쟁이가 꼭 그림 같다.
20221008_204118.jpg
20221008_212516.jpg
해진 후 중정과 회랑과 성당 종탑이 한번에 보이는 풍경. 방문 앞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8유로에 매우 아름답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하루 쉬어 갈 수 있는 행운은 순례자이기에 가능하다.

이틀간 3번 잘못 든 길을 들었지만, 결국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 원래 길에서 만났을 풍경이 아쉬웠지만 잘못 든 길의 풍경은 원래의 길이 아쉽지 않을 만큼 좋았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계획한 대로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경우도 많다.

이제 북쪽길은 마지막 단계로 완전히 접어들었다.

북쪽길 31일차 램블러.jpg 갈리시아 길 5일 차는 32km에 획득고도는 648m였다.

이제 북쪽길에서 내가 더 걸을 수 있는 길은 60km가 채 남지 않았다. 걷고, 씻고, 먹고, 사진확인하고, 간단히 일기 쓰고 하는 단순한 일상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 이런 길을 또 걷지 않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찾을 수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