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없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북쪽길
갈리시아의 4,5일 차는 Vilalba 빌랄바 ~ Parga(A Pobra de Parga) ~ Sobrado dos Monxes(por As Cruces)의 63km 구간. 중간 마을인 바아몬데(Baamonde)에서 Sobrado dos Monxes 소브라도 도스 몽세스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루트가 있다. 40km 길이의 전통적인 루트인 Miraz 미라스 마을을 지나는 방식과 2017년 지방정부에 의해 새로 표지판이 추가된 32km 거리의 por As Cruces 뽀르 아스 크루쎄스 루트 중 고를 수 있다. 미라스 루트 대신 뽀르 아스 크루쎄스 길을 선택한 난 안 그래도 사람이 별로 안 다니는 길안에서 또 길을 잃어 두 시간 넘게 원시의 숲 안에 흐르는 빠르가 강을 따라 이동했다. 정상 루트는 아니지만 그 길이 주는 천연의 느낌 때문에 꽤 괜찮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덕분에 앱에서는 빌랄바에서 바아몬데까지 18.3km, 바아몬데에서 목적지인 빠르가까지 7km라고 소개했지만 실행 도상거리는 30.7km로 5km 정도 돌아온 셈이다.
오늘의 시작도 역시 해뜨기 전이라 어둡지만, 마을 중심은 가로등이 있어 불편함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빌라바 중심의 알베르게는 역시 좋아 보였지만, 공립 알베르게도 충분히 좋았으므로 아쉬울 건 없다. 낯익은 한글을 만날 수 있었는데, 스페인 시골도시에서 만난 태권 도장이 꽤 반가웠다. 국뽕이 차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 8 각형인지 6 각형인지 애매한 탑이 하나 보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국립 파라도르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Castillo de Andrade' 성의 일부라고 한다. 파라도르 호텔은 스페인의 오래된 건축물을 활용해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각 도시마다 거의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거의 4성급이었던 것 같고 이곳은 평일에는 10만 원 내외라 부부가 같이 순례길에 이용해도 참 좋을 것 같다.
우기가 시작되는 10월 즈음부터 갈리시아 지방은 아침 안개가 기본값인 듯싶다. 언제부터인지 아침엔 계속 안개를 만난다. 나무가 우거진 길과 안개가 내려앉은 시골 풍경이 참 좋다.
빌랄바에서 5km 좀 넘게 걸어 꽤 오르막인 곳 정상즈음에서 뒤돌아 보니 헉! 빌랄바의 높은 건물 상층부만 안개의 바다에 섬처럼 떠 있는 듯 보인다. 카메라 렌즈에 이슬이 맺히는 바람에 선명하게 찍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200mm 이상의 망원 렌즈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자의 뒷모습. 길과 참 잘 어울린다. 가끔 사진에 찍힌 순례자를 알베르게에서 만나면 이메일 주소를 묻고 사진을 보내줬다. 나도 뒷모습이 찍히고 싶지만, 난 날 찍을 수 없다. 뒷모습의 사진을 받는 기쁨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난 합법적으로 사진을 얻는다. 물론 동의받지 않은 촬영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고 딱히 상업적인 기고에 사용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하던 길은 고속도로와 만났고 그곳에서 다시 안개바다의 빌랄바를 만난다.
'Baamonde'에 들어선다. 이곳에는 공립알베르게도 있으나 너무 이른 도착이기도 하고 이미 예약해 놓은 Parga까지 가야 했기에 식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배도 고프고.
로터리에 위치한 Café-Bar A Rotonda에 들어가 쁠라토 콤비나도 plato combinado와 맥주를 주문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가운데 귀여운 점원이 열심히 들어주어서 주문을 마치긴 했다. 로모, 우에보, 빠따따스 달라고 했는데 뭐 원하는 대로 나오긴 했다. 맛은... 그저 그랬지만 배를 채워야 했기에 남김없이 먹었다. 그나마 8유로였으니 이 정도면 만족. 서비스 안주인 올리브는 짭짤하긴 한데 솔직히 뭔 맛인지... 짭짤한 미원에 절인맛? 잘 모르겠다. ㅋ
갈리시아 들어오면서 부추처럼 생긴 풀에서 보라색 꽃이 피어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닥에서 자라 딱히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구간 중 숲 속 길에 잘 보존된 'Capela do Santo Alberte en San Breixo' 유적 근처 풀밭에 무더기로 피어 있어 성당 구경을 하는 김에 바닥에 앉아 이 꽃들을 담아 보았다. 표준 줌렌즈 1개로 잘 담을 수 없는 게 좀 아쉬웠지만. 사실 뚠뚠한 내 몸뚱이는 쪼그려 앉는 게 너무 힘들다.
꽃도 구경할만했지만 외진 곳에 있는 성당 유적인 'Capela do Santo Alberte en San Breixo'은 뭐랄까 좀 신비로왔다고나 할까? 성당 옆으로는 느리게 흐르는 'Parga 빠르가'강과 강변의 하이킹을 위한 소로가 있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하비에르를 이 성당에서 만났다.
10분 넘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길을 찾아 걷는데, 그론세 앱에 따르면 이곳에서 길이 오피셜 로드와 대안 길로 나뉘게 된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이 길을 가게 된다면 mapy.cz 맵을 참고하지 말고 노란 화살표를 찾아 걷는 것을 우선으로 하길 바란다. 지도를 읽는 나의 착각은 강을 따라 나있는 mapy.cz의 노란색 하이킹길을 쫓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좀 많이 돌아가는 코스였다. 1시간 정도는 손해 본 듯하다. 그래도 강을 따라 나 있는 매우 한적하고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어서 나름 좋았다. 다만 혼자서 어두울 때 걷는다면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
강변의 길을 벗어나 차도로 올라온 후 표지판을 보니 오늘의 목적지 'Parga 빠르가'다. 길을 잘못 들어 힘들었지만 돌아온 숲 속 길은 참 좋았다. 일단 사람 사는 마을에 들어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의 숙소인 'Parga Natura Alojamiento'는 빠르가 강을 건너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되짚어 내려와야 하는 길을 힘들게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공동묘지와 성당이 아름답다.
오늘의 숙소는 20유로에 예약했는데, 침대는 좀 삐걱대지만 나머지 시설은 깨끗하고 편리해서 좋았다.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피우는 연초 한대는 정말 좋았다.
식당이 있는 마을로 다시 내려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 그냥 숙소에 저 제공하는 저녁을 12유로에 신청했다. 하지만 맛은 있는데 고기를 안주는 서운함. 비건도 아닌데... 아... 뭐지?
어제 힘들게 올라온 언덕을 거꾸로 내려간다. 차도까지 내려가서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까미노 화살표를 찾지 못하고 강 오른쪽에서 발견한 트래킹 길표시를 따라 다시 강변을 걷는다. 이것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ㅠㅠ 역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젊은 순례자들이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들은 제대로 까미노 화살표를 찾아 걸었기 때문일 건데... 나는 왜 찾지 못한 것일까?
어쨌든 아름다운 아침의 빠르가 강변을 힘들고 상쾌하게 걷는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제대로 가는 방향의 길을 찾아 강변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 까미노 화살표를 찾아 걷는데 마음이 편해진다.
8km 넘게 걷다 오픈한 바르를 하나 만났다. 콜라 한 병과 담배 한 대로 잠시 쉬어간다. 'Taberna da Modia 따베르나 다 모디아' taberna는 선술집, 주점, 바의 의미를 가진다.
언덕 중간에 있는 마을을 지나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능선을 넘어 아스팔트 곁길과 숲사이 숲길로 계속 이어진다.
'아 꼬루냐'주(도) 표지판을 만난다. 아 꼬루냐는 또 하나의 땅끝이라고 알려진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곳이고, 글로벌 패션 브랜드 'ZARA 사라'의 본사가 있는 곳이고 영국길의 시작점 중의 한 곳이다. 이곳 북쪽길에서 '아 꼬루냐'까지 직선거리로는 35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체감할 수 있다.
'Paraños 빠라뇨스'라는 작고 깨끗한 마을을 지나는데 바닥에 떨어진 밤을 몇 알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한 개씩 까먹었는데 먹을만하다.
크진 않지만 레스토랑이 있는 'As Cruces 아스 크루쎄쓰'에서 잠시 쉬어간다. 중심 로터리에 자리 잡은 'Meson Manolo 메쏜 마놀로'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를 할까 했는데, 아직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보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라 그런지 딱히 친절하지도 않고 해서 콜라만 한병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는데 통신회사 차량 같은 밴에서 젊은 친구들이 내리더니 맥주를 마신다. 맥주 정도는 마시고 운전해도 되는 분위기인가 보다. ㅋ
'Meson Manolo'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 조금 가면 표시석이 두 개가 나온다. 소브라도 방향의 표시판이 하나 별도로 있고 그쪽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석에 남은 거리가 오른쪽 직진 방향의 표시석에 남은 거리보다 길어 무심코 직진 방향으로 걸었다. 아... 집중력, 판단력이 어제오늘 참 엉망이다.
길을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까미노 화살표가 나오기는 하는데 지나는 순례자가 하나도 없다. 뭐 늘 순례자 보기가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mapy.cz를 열어 지도를 확인하니 이 길은 소브라도로 진행하는 길이 아니라 소브라도 지나 Boimil 이라는 마을로 가는 일종의 지름길 같은 길이다. 젠장. 하지만 보이밀 방향의 알베르게는 이 지점에서 20km 정도 가야 하기에 'A Torre' 마을까지 가서 다시 소브라도 방향으로 좌회전해 가는 길을 택했다. '아스 크루세스'에서 4.7km 거리의 길을 10km 넘게 돌아서 간다. 젠장... ㅠㅠ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멘털이 좀 흔들렸지만 어제오늘 걷기 컨디션이 이상하게 좋았다. 때문에 오르막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을 수 있어 왠지 강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그냥 기분 탓인가.
갑자기 집들 사이로 멋진 소브라도 수도원의 성당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와!
마을 골목 교차로에선 돌 십자상에 피에타(돌아가신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었는데 작은 성모의 얼굴에서 슬픔이 보인건 그냥 착각이겠지.
차도를 따라 이루어진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래 사진처럼 건물 밑으로 만든 터널길을 통과해야 한다. 수도원이나 성당의 접근 방식이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입구를 통과하면 상당한 규모를 가진 성당의 모습이 멋지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Mosteir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갈리시아어 표기)는 소브라도에 있는 수도사들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라는 의미. 951년경 처음 세워졌다고 하고 쇠퇴기를 겪다가 17세기에 대규모 재건축과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835년 스페인의 교회 재산 몰수로 인해 문을 닫았고 수십 년 넘게 방치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66년 시토회 수도사들이 돌아와 정부 기관 및 개인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복원되고 수도생활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북쪽길에서는 꼭 머물러 가야 할 매우 의미 있고 아름다운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는 수도원 성당이다.
알베르게 입구에서 신부님 한분과 도우미 한분이 친절하게 접수를 받는다. 침대를 배정받고 수도원의 중정을 지나 방에 도착하니 개보수(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하고 깔끔하고 쾌적했다. 이층 침대는 매우 튼튼하게 벙커 타입으로 만들어져 삐걱거리지 않아 좋다. 기대하지 않았던 공립 알베르게에 마음이 좋아진다.
아름다운 수도원 성당 안에 만들어진 알베르게인데 편리하기까지 하다니.
깨끗한 샤워실에서 씻고 빨래하고 마트 가서 먹을거리와 발바닥 통증완화를 위한 볼따렌 뽀르떼를 사서 돌아왔다. 그냥 레스토랑 들어가서 사 먹을까 하다가, 이곳의 부엌 시설이 너무 좋아 간단히 먹기로 한다. 문어 통조림(문어인지 오징어인지?), 컵라면, 바게트, 살치촌, 요구르트, 콜라, 맥주... 진수성찬이다. 이태리 할아버지 4 인조 +1인 + 스페인 처자 2명의 무리들은 다른 무리들과 합세해 주방을 점령하고 요리 삼매경에 빠졌다. ㅋ
식당에서 앞뜰이라고 해야 하나, 뒤뜰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빨래를 말리는 곳으로 나왔는데 오래된 수도원 건물과 담쟁이, 빨래들, 그리고 쉬고 있는 순례자를 보니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다. 큰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아쉽다.
8유로에 매우 아름답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하루 쉬어 갈 수 있는 행운은 순례자이기에 가능하다.
이틀간 3번 잘못 든 길을 들었지만, 결국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 원래 길에서 만났을 풍경이 아쉬웠지만 잘못 든 길의 풍경은 원래의 길이 아쉽지 않을 만큼 좋았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계획한 대로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경우도 많다.
이제 북쪽길은 마지막 단계로 완전히 접어들었다.
이제 북쪽길에서 내가 더 걸을 수 있는 길은 60km가 채 남지 않았다. 걷고, 씻고, 먹고, 사진확인하고, 간단히 일기 쓰고 하는 단순한 일상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 이런 길을 또 걷지 않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찾을 수 없다.